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공손찬 (문단 편집) === 변경의 영웅, 이민족 킬러 === 당대 중국 문화권에서는 변방 오브 변방에 비(非) 한족계 민족들이 다수 섞여 살았던 요서군 출신이라 항상 변경을 침공하는 오랑캐들에게 강경했지만, 의외로 휘하 장수인 유비의 기병에서 볼 수 있듯이 오환족 기병을 거느리는 등 유화적인 면도 있었다. 오랑캐들에게 항상 무서운 얼굴로 잔인하게 말하고 부모의 원수 대하듯 대했다는 영웅기의 기록같은 걸 보면, 싸울땐 싸우고 자신에게 투항하는 자는 관대하게 받아주었던 듯 하다. 매우 용맹하여 적군이 움직이는 흙먼지를 보곤 본인이 직접 달려나가 대낮부터 한밤중까지 미친듯이 싸워댔다는 기록이 남을 정도로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는데 전혀 주저함이 없었다. 동탁이 위관이나 영관급에 해당하는 별부사마나 도위를 지낼 때는 그럭저럭 유능함을 인정받다가 장성급인 중랑장으로 올라간 이후부터는 졸전을 거듭하면서도 윗선에 뇌물을 바치며 지위를 유지하고, 부하들에겐 노략질한 약탈물을 분배하고 이익을 공유하면서 얻은 지지, 혹은 사실상의 공범의식을 통해 군권을 사유화하고 이를 스스로의 정치적 기반으로 삼는 등 야심 많고 무능하고 부패한 정치군인의 전형적인 행보를 보였던 것과는 달리 공손찬은 군사적인 활약상만큼은 굉장히 화려한 편이고, 간지나는 일화도 제법 많아서 영웅으로 추켜세워주는 분위기도 있다. ||初平二年,青、徐黃巾三十萬眾入勃海界,欲與黑山合。瓚率步騎二萬人,逆擊於東光南,大破之,斬首三萬餘級。賊棄其車重數萬兩,奔走度河。瓚因其半濟薄之,賊復大破,死者數萬,流血丹水,收得生口七萬餘人,車甲財物不可勝筭,威名大震。拜奮武將軍,封薊侯。 기병 2만으로 약 30만의 황건군(蟻軍)을 치고 다시 친 뒤 또 쳐서 3만의 목을 자르고 수만을 더 죽였으며 7만을 산채로 포획하였고 물자를 노획하였다.|| 공손찬은 서강족을 멸해버린 [[태위#s-1]] [[단경]]과 같은 꿈을 꾸었는데 실제로 북방에서는 '''흉노를 써는 자, 요서의 공손백규'''라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단경은 그야말로 강족을 썰고 또 썰어서 걍 씨를 말려버리고 영제에게 오랑캐 장수의 인새를 수도 없이 바쳐 비단과 금, 부절 등을 하사받았다. 출전은 《후한서》 〈영제기〉. [[서진]]의 멸망 이후 이민족들이 중원에 들어온 것에는 공손찬이 지배한 하북지방이나 서쪽의 [[촉한]]처럼 각 지방 세력들이 몰락한 것에도 원인이 있다. [[원소(삼국지)|원소]]는 최소한의 전투와 선전술만으로 공손찬의 세력을 훼손하지 않고 흡수했지만, 이후에 조조는 위왕조를 세울 때 하북세력의 대다수를 억누르는데 힘을 쏟았다. 게다가 이어진 반란과 내전으로 변경지역의 역량은 계속 약화되어서, 오호십육국 시대에는 공손찬만큼의 능력과 세력을 양립한 대군벌이 나오기 힘든 상태였다. 공손찬은 변방에서 백성들을 괴롭히는 이민족을 토벌하며 그 지역의 인심을 얻고 세력을 불린 전형적인 변방군벌이었다. 유우의 측근들, 이를테면 [[위유]] 같은 사람들조차 공손찬은 군사적으로 명성이 있으니 조금의 흠결이 있더라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공손찬은 이민족에 시달리던 변경의 주민들에겐 이민족을 물리치는 지역영웅으로의 입지가 있었다. 하지만 지역을 지키는 변방영웅의 사고방식에만 머물러 이 지역을 자신의 관할이라는 생각하에 불법적으로 세를 불렸고 결국엔 [[원소(삼국지)|원소]] 같은 중앙정계 인물에 밀렸으며 이민족 문제로 [[유우(삼국지)|유우]]과 갈등을 빚다 그를 살해하는 자충수를 두고 모든 명분을 잃어버린채 백성들과 유우, 원소 세력의 공공의 적이 되어 스스로 몰락해 버렸으니 애석하다 할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