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공손찬 (문단 편집) === 용병술 === 북방 이민족들은 모두 공손찬의 이름을 알았고, 그 무용을 두려워하여 침범하는 자가 없었다. '''정예 100명을 뽑아서 유우의 10만을 와해시켰다'''든지 스스로 전장을 휘젓고 이민족을 수도없이 베어버린 전적을 보면, 군사적인 능력으로 폄하할만한 인물은 절대로 아니다. 게다가 계교전투와 국의와의 대결 외에는 잘 싸운 편이고, 역경에서 농성하다가 국의에게 역습을 가해 격파하기도 한다. 중국 최강이었던 공손찬의 세력은 원소의 정치 선전술 때문에 자동적으로 찢어져버렸지만, 공손찬이 고립된 이후의 상황만을 보고 폄하하는 대다수의 주장에도 무리가 있다. [[조조]]마저도 헌제와 순욱이 없었으면 고립당했을지 모를 정도로 원소의 정치술 자체가 엄청났던 것이다. 또한, 완전히 전세가 역전되어 고립된 상황에서도 게릴라로 국의와 원소를 괴롭히고 '''심지어 역습으로 죽일 뻔했던''' 전적을 보면 용병술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괴물이었다. 그 밖에 당대 중국의 기병들은 [[등자]]가 없었으며, 당대의 중국에 [[카타프락토이|중장기병]]을 이용한 충격전술이 들어왔는지도 명확하지 않았다. 특히 기록으로 추측하건대 적어도 공손찬은 [[기마궁수]]를 운용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실제로 바로 아래 있는 백마의종에 대한 설명은 이러한 기병들에 대한 설명이다. 공손찬은 경기병이 강한 [[오환]], [[선비족]] 등과 대결하다보니 경기병 편제를 주로 갖춘 것으로 추정되며 이러한 형태의 기병들은 피아 쌍방 기병전력이 강할수록 경무장의 경기병에 치중된 편제를 갖추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중기병이 경기병의 기동성에 말려드는 경우가 많다. 중기병은 주로 보병과 궁병에게 강하다.] 기마민족을 상대할 때에나, 무장 자체가 미비한 황건적 같은 도적떼를 상대할 때에는 절대적인 위력을 발휘하지만 충격력은 확실치 못했고, 대기병 맞춤형 전술을 갖춘 정예보병을 상대하는데는 효과적이지 않았다.[* 궁기병은 물론 강력한 병과이긴 하지만 무적까진 아니었다. 잘 훈련된 보병이 대열 흐트러뜨리지 않고 버티면서 투사무기로 대응하면 취약했으며, 창기병 돌격에도 약했다. 흉노식 궁기병 전술은 이미 한나라가 파해법을 마련했다. 실제로 이후 유목민 제국들의 군대는 일반적인 인식보다 중장기병의 비율이 높은 편이었다.] 공손찬 부대의 이러한 특징이 원소와 [[국의]]를 포함하여 [[보병]]과 지형 전술을 활용하는 데 능숙한 [[한족]] 군벌들에게 패퇴한 이유라는 주장도 있다. 특히 공손찬이 활동하던 북방지역이나 국의가 활동하던 서량주 지역 한족병사들은 농경민족의 창병+강노병 조합의 중보병진으로 이민족들의 경기병을 공격하는데 이골이 나 있었는데 공손찬의 주력은 경기병이었으므로 이를 상대하는 경험이 부족했다고 할 수 있다. 이후에도 공손찬은 이를 극복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원소군과는 한때는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펼쳤다는 점에선 용병술을 높이 살 순 있다. 결국엔 원소가 오환족과 연계해 보병과 기병의 유기적인 진영을 구축하여 군사 부분에서 우위를 잡고 한편으론 교묘한 정치술로 공손찬을 고사시켜 버리지만.[* 뒤집어보면 원소의 교묘한 정치술로 자기 편이 하나도 없는 상태에다가 부하들도 슬슬 흔들리고, 이민족들과 연계해 사방이 적인 상태에서 오직 군사적 능력만으로 버텼던 것이다. 실제 역사상의 원소는 정치력이 만렙에다가 군사적 성과도 절대 무시못할 수준인데, 그 원소가 사력을 다해 공략한게 바로 공손찬이었다. 물론 원소가 관도대전 당시처럼 세력이 강대한 건 아니었지만. 즉 연의에서 공손찬이 '그 소인배 원소에게 몰락한 한심한 놈'으로 오해를 받는다면, 실제 정사에선 '그 무서운 군웅 원소니까 간신히 무너뜨린 괴물 군벌'이 공손찬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