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공병우 (문단 편집) == 기타 == 공병우의 좌우명은 '시간은 생명이다.'이다. 그래서 '''국민들이 시간을 절약할 수 있도록''' 빠른 자판 개발에 힘써 온 것이다. 이를 통해 세벌식 자판은 [[두벌식]] 자판보다 더 빠르고 효율적이라는 평가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http://uncyclopedia.kr/wiki/%EC%84%B8%EB%B2%8C%EC%8B%9D_%EC%9E%90%ED%8C%90|백괴사전]]에서는 몇몇 게임의 단축키가 세벌식에서 작동이 안 된다고 공병우에 대해 불평하기도 했다. ~~국민들이 게임에 빠질 것을 우려한 예언가라는 반응.~~ ~~하지만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경우는 세벌식도 지원한다~~] 한글 타자기 개발에 대한 공로로 특허청은 1999년도에 공병우가 대한민국 7대 발명가 중 하나라고 발표했다.[[http://blog.naver.com/themotivator/60212695865|#]] 공병우의 생각을 잘 나타낸 저서로는 자서전인 '나는 내 식대로 살아왔다' 등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창씨개명]]을 요구받자 자신이 죽었다고 선언했다는 일화가 있고, 시간 절약을 위해 1950년대 당시에 집 구조를 미국식으로 바꾸어서 이웃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당했다는 일화도 있다. 당시에는 화장실이 다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공병우가 화장실 가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화장실을 집 안에 들여놓았기 때문이었다. 일제강점기를 기점으로 화변기가 조금씩 들어왔고, 당시의 글이나 신문을 보면 1920년대에는 웬만큼 사는 집안에선 이미 화변기를 꽤나 설치해 놨었다. 이런 점을 종합해봤을때 공병우 박사가 사는 집 정도면 푸세식은 좀 터무니없고, 최소 화변기 이상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민주주의에도 크게 기여하였는데, 1980년대 민청련 초기자금이 없어서 허덕이던 시절 문제 소지가 될까 현찰을 대주지는 못하고 공병우 타자기를 수십 개 기증하는 것으로 자금마련에 도움을 주었다. 1995년 89세의 나이에 노환으로 사망 뉴스가 나오자 당시 [[PC통신]] 게시판은 공병우 박사에 대한 조의글로 넘쳐났는데, 당시 PC통신 게시판이 한 사람에 대한 조의글로 페이지를 가득 채우는 것은 거의 최초의 일이었다. 한 기자는 이를 '''네티즌들의 사회장이 열리고 있다'''라고 표현했다. 타계 당시 유언으로 "나의 죽음을 세상에 알리지 말고, 장례식도 치르지 말라. [[장기기증|쓸 만한 장기는 모두 기증하고]] [[카데바|남은 시신도 해부용으로 기증하라]]. 죽어서 땅 한 평을 차지하느니 차라리 그 자리에서 콩을 심는 게 낫다. 유산은 맹인 복지를 위해 써라"라는 유언을 남겨서 카데바는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기증되었다. 생전에 소설가 [[황석영]]과 안면이 있었다. [[장길산]] 연재 당시 황석영이 술집에서 지인들과 술 마시다가 본인의 주특기인 [[약장수]]의 [[재담]]을 늘어놓고 있는데[* 황석영은 이미 1970년대부터 '조선의 3대 구라'로 꼽힐 만큼 재담이 뛰어났다. 요새는 '황구라'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를 싫어하는데 비슷한 이름의 [[김구라]]와 [[황우석]]이 또 '황구라'라고 불리는 등 독창성이 훼손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마침 그 옆자리에서 공병우도 지인들과 함께 있었다. 한참 재담을 재미있게 듣고 나서 공병우는 황석영을 불러 "자네는 무슨 일을 하나? 그리고 이름은 무엇인가?"라고 물었는데, 그 와중에도 장난기가 그치지 않던 황석영은 자신의 직업이 약장수이고, 이름이 황석영이라고 밝혔다. 공병우는 "자네 같은 건달이 약이나 팔 일이지, 어찌 황석영 같은 작가의 이름을 팔고 다니는가?"라고 호통을 쳤다. 잘못하면 오히려 자신을 욕되게 할 것 같아서 황석영은 그냥 자리에서 물러났다고 한다. 부친이 [[신의주시]]에서 상점을 운영했는데, 그 곳에서 일한 사람들 중 한 명이 [[손기정]]이다. 공병우는 고문조작 사건인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에서 피고인의 눈이 고문에 의해 손상됐는지를 감정했으며 [[백인제]]는 피고인의 요통과 팔다리 상처가 고문에 의한 것인지를 감정했다. 피고인 신체의 이상이 고문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진단했다. 원래 고문 흔적이 남지 않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고문 기술이며, 정판사 사건에서 자행된 건 물고문이라 상처를 남기는 고문이 아니며, 고문이 가해진지 5개월이나 지났다는 점에서 고문 흔적은 진짜로 남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PTSD]]나 [[고문]] 후유증에 대한 인식이 없었던 당대로서는 이것이 피고인에게 불리하게 작용되었다. 백인제나 공병우의 검진과 그 결과는 어쨌든 시대적 한계이지만 문제는 이들에 대한 각종 평전이나 자서전 등이 대한민국 독립운동가와 노동자들에게 누명을 씌우는 서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피고인은 20년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한 사람이며 2020년재 현재도 각종 독립운동사 개론서에 등장하는 중요한 독립운동가이다. 각종 평전이나 자서전은 아예 사건 관련 순수 사실관계도 틀려서 검진을 받은 적도 없는 피고인을 검사했다고 쓴다. 가장 유명한 피고인 둘은 검진받지 않았는데 가장 유명한 피고인이 검진받았다고 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