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공민왕 (문단 편집) == 기타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Cheonsandaeryeopdo.jpg|width=100%]]}}} || || {{{#000000 '''<천산대렵도>''' }}} || * 뛰어난 [[예술]]적 감각을 지녔던 군주였으며, 특히 [[그림]]에 뛰어나 대표작으로 <천산대렵도>가 유명하고, 아끼는 신하 염제신[* [[염흥방]]의 아버지]의 초상화도 직접 그려줬다고 한다. * 직접 [[거문고]]를 다루기도 했다는데 [[https://blog.daum.net/vmffktlqh/15857984|공민왕이 다룬 것으로 전해지는 거문고]]가 [[충청남도]] [[예산군]]에 위치한 [[수덕사]]에 있다. 공민왕 사후, [[길재]]를 통해 조선 [[왕실]]에서 거문고를 소장해오다가 [[일제강점기]] 때 [[의친왕]] 이강이 당시 수덕사의 [[승려]]인 만공에게 [[선물]]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 서울 마포구 창전동에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를 모신 공민왕 사당이 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조선시대 초 서강 일대에 광흥창을 지을 때, 한 마을 노인의 꿈에 공민왕이 나타나 당을 짓고 해마다 제사를 지내면 광흥창과 서강 일대가 평안할 것이라는 계시를 내렸다. 이후 꿈에서 깨어난 노인이 밖으로 나가 보니 공민왕의 영정이 발견되었고, 그 자리에 공민왕 사당을 지었다고 한다. 이후 해마다 10월 21일[* 원래는 매년 음력 10월 1일에 서강 일대 주민들 중심으로 제사를 모셨다가 2004년부터 양력 10월 21일로 변경되었다.]에 공민왕 사당제를 지내고 있으며, 사당 건물은 국가등록문화재 제231호로 지정되어 있다. * [[박정희]] 대통령 이전까지 한국사에서 공식적으로 마지막으로 암살당한 국가원수였다.[* 암살은 "비합법적으로 몰래 살해하는 것"을 말하기 때문에 (수양이 마음대로 휘두르긴 했으나)어쨌든 "법"의 범주 내에서 사실상 "처형"된 단종은 암살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으며, 숙청 내지 살인교사로 봐야 한다. 즉 조선시대에는 '''암살당한 왕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조선과 고려의 근본적 시스템 격차가 드러나는 부분.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조선의 왕권이 얼마나 튼튼하고 굳건했는지를 반증하는 사례라 할 것이다. 20대 경종이 독살설이 있기는 하나 어디까지나 설에 불과하며 명확한 증거나 사료는 없다. 다만, [[고종(조선)|고종]]의 경우 그의 사후 시신의 상태에 대한 [[윤치호 일기#s-2|윤치호 일기]] 등의 기록 상 독살의 가능성이 매우 높은 정황들이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공식적인 사인은 뇌일혈 또는 심장마비로 인한 자연사로 알려져 있다. 특히, 고종은 이전에도 [[김홍륙]]에 의한 암살 미수 사건을 겪었을 뿐만 아니라 광무개혁을 주도하여 일제에 의해개혁이 중단되지 않았더라면 대한제국이 일제에 대항할 수 있었을 가능성이 높았고 대한제국이 일제에 의해 [[을사조약|외교권을 침탈]]당하고 일제의 강제적인 조약 체결에 대해 그 불법성을 [[헤이그 특사|국제사회에 호소]]하다 강제로 퇴위당하고 여러번 망명을 시도하였으며 독립운동가들에게 내탕금과 밀지를 하사하고 대한의군을 설립하는 등의 항일활동을 하였으며 황제가 승하할 당시 황제는 순조롭게 망명을 준비하고 있었고 헤이그에서 열렸던 회의처럼 파리에서 회의가 열릴 예정이었기에 다시 대한제국 특사가 파견될 상황에서 일제와 친일내각으로서는 눈엣가시와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이들로부터 끊임없이 목숨의 위협에 시달린 바 있다는 점에서 독살의 가능성에 대한 합리적 의심을 배제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민왕이나 박정희 대통령과 같이 암살의 주범이 명백하게 드러난 경우가 아닐뿐더러 심증과 기록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 한계로 그의 직접적인 사인에 대해 과학적으로 증명할 방법이 황제의 홍릉을 발굴하는 방법뿐이라는 점에서 공식적인 암살 사례에서는 제외된다.] * [[원 간섭기]] 이후의 고려 말기 [[군주]] 중 '''마지막으로 [[정권]]을 장악했던 군주'''였기에 사실상 고려의 마지막 군주로 평가되기도 하는데 [[역성혁명]]으로 고려 왕조를 장악하고 조선 왕조를 개국한 [[태조(조선)|이성계]]가 진정으로 충성심을 바친 군주이다. 고려 왕조에서 마지막으로 재위 중 종신(終身)한 왕이다. 그 뒤의 왕인 아들 [[우왕]]과 손자 [[창왕]]은 둘 다 [[신돈]]의 후손인 신씨(辛氏)로 몰려 폐위되어 유배간 후 유배지에서 사사되었으며 마지막 왕인 [[공양왕]]은 어떻게든 고려를 지키기 위해 [[태조(조선)|이성계]]에게 군신 동맹을 맺자고 하며 끝까지 선양을 하지 않고 버티다가 폐위된 후 2년여 뒤에 사사되었다.[* 공교롭게도 충정왕 이후 공양왕까지 고려의 왕들은 모두 병사(病死)가 아닌 독살이나 암살, 사사 등으로 생을 마감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