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공민왕 (문단 편집) == [[시호]], [[존호]] == 고려는 원 간섭기에 들어서고, 충렬왕 시대부터 5묘제 태묘를 사용하고, 묘호를 올리지 못하게 되었다. 원 묘호가 올려진 임금들은 모두 시호로 격하됐다.[* 1대 태조는 신성대왕, 4대 광종은 대성대왕, 8대 현종은 원문대왕 등.] 충렬왕 대부터 원나라의 간섭으로 시호조차 올리지 못하게 되었는데[* 충렬왕의 경효, 충선왕의 선효, 충숙왕의 의효, 충혜왕의 헌효, 충목왕의 현효라는 시호는 공민왕 6년에 일괄적으로 올려진 것이다.] 이는 고려가 원의 부마국이 되면서 원 천자의 제후로 편입되었기 때문이었다. 즉 신하로서 군주에게 시호를 받는 처지가 된 것이다. 《고려사》 <예지> -태묘- 조에는 공민왕이 다시 7묘제 9실 제도를 사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공민왕이 종묘에서 섬긴 아홉 군주는 태조, 혜종, 현종, 원종, 충렬, 충선, 충숙, 충혜, 충목이었다. 잘 보면 묘호가 올려졌던 임금들은 모두 묘호가 회복됐지만 묘호가 없던 군주들은 묘호를 추가로 올리지 않았다는걸 알 수 있다. 이는 공민왕이 현실과 어느 정도 타협을 했기 때문이다. 쇠퇴했다고는 하지만 어느 정도 여력이 남아있던 원을 불필요하게 자극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며, 종묘 제도는 천자의 제도를 따르되 묘호는 따로 올리지 않았다. 대신 공민왕은 충렬왕 이하의 군주에게 시호를 독자적으로 올려 어느 정도 선까지 자주성을 회복시켰다. 그래서 공민왕 본인 역시 묘호가 없다. 대신 고려가 다시 자주적으로 올린 시호가 있는데 [[우왕]]이 재위 2년에 올린 시호는 '인문의무용지명열경효대왕'(仁文義武勇智明烈敬孝大王)으로, 약칭으로는 '경효대왕'(敬孝大王)이었다. 명나라가 시호를 보내주기 전까지 '경효대왕'으로 주로 불렸다. 당시 고려가 상국으로 우대하던 명나라는 우왕 재위 11년에 '공민왕'(恭愍王)이라는 시호를 보냈다. 이 시호가 간단하고 오랫동안 쓰였다보니 보통 이 시호로 알려져 있다. 양국의 시호를 합쳐 '공민인문의무용지명열경효대왕'(恭愍仁文義武勇智明烈敬孝大王)이라고도 한다. 나중에라도 묘호가 올려졌다면 좋았겠지만 다음 왕으로 즉위한 [[우왕]]은 [[위화도 회군]]으로 인해 폐위당했고, 그 다음 왕인 [[창왕]]은 <우창비왕설>에 휘말려 폐위 후 우왕과 같이 처형당했으며, 마지막 왕인 [[공양왕]]도 조선 건국으로 인해 폐위당하면서 묘호를 올릴 사정이 되지 않았다. 이후에 들어선 조선 왕조 역시 자신들의 건국 정당성을 위해 고려 왕조의 묘호 없는 왕들에게 묘호를 올릴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충렬왕]]부터 [[공양왕]]까지 묘호가 없는 고려 국왕들은 오늘날까지도 시호로만 불리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