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공녀 (문단 편집) === 조선 시대의 공녀 === 원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 대륙과 [[만주]]를 차지한 [[명나라]]에서도 공녀를 요구해왔다. 그나마 원나라처럼 심하지는 않았지만, [[조선]] 초기에만 명나라에서 모두 12차례에 걸쳐 공녀를 요구하였다. 이 가운데 명나라 황제의 사망 등으로 5차례는 중지되고 실제로 공녀가 보내진 것은 7차례였다. [[이방원|태종]] 8년(1408)에 처음으로 공녀를 보냈고, 1408년에서 1417년까지 3차례에 걸쳐 공녀 40명이 명나라로 갔다. 그리고 [[세종(조선)|세종]](1427~1433) 때 4차례에 걸쳐 공녀 74명을 보냈다. 명나라에서는 원나라와 다르게 뽑힌 공녀와 공녀를 모실 여종들 역시 함께 갔다. 기록에 따르면 뽑힌 공녀는 모두 16명이었지만, 그에 따른 여종들은 48명으로, 이 밖에도 집찹녀 42명과 기무녀 8명을 합하면 명나라 때의 공녀는 총 114명이다. 일단 공녀를 보내라는 요청이 오면 조선 조정은 임시로 진헌색(進獻色)이라는 기관을 설치하고 나이 어린 양가 처녀들을 선발하였다. 하지만 자진해서 머나 먼 이국땅으로 고이 기른 딸을 보낼 사람은 없었다. 하여 나라에서 내린 금혼령을 피해 황급히 딸들을 결혼시키는가 하면, 몹쓸 병이 들었다고 거짓 고하기도 하고 몰래 숨겨놓기도 하였다. 공녀를 원한 명나라 황제들 중 유명한 사람은 [[영락제]]였다. 조선의 여자들이 상냥하고 아름답다는 소문에, 사신(황엄)을 여러 차례 보내 공녀(貢女)를 차출하게 하였다. 영락제가 개인적인 사유로 조선인 여자를 원했을 수도 있다. 영락제의 생모가 [[효자고황후]] 마씨가 아닌, 고려에서 원나라로 온 공비(貢妃)라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명나라 황실종묘의 제사를 주관하는 곳의 기록인 '남경태상사지(南京太常寺志)'에서 영락제의 생모는 공비(碽妃)라고 하였는데 중국에는 '공씨(碽氏)'라는 성이 없어, 황제의 생모를 차마 고려에서 온 공녀(貢女)라고 적을 수는 없어서 슬쩍 바꾼 듯하다고 추정되기 때문. 또한 '경례남도봉선전기사(敬禮南都奉先殿紀事)'에는 영락제의 능묘인 효릉에서 비빈들의 신위가 모여있는 곳을 두고 "여러 비빈들이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한 비(妃)만이 서쪽에 있다. 성조(영락제)를 낳았기 때문에, 다른 비빈들이 감히 나란히 할 수 없다"고 묘사하기도 했다. 그렇게 영락제가 살아있는 동안 공녀 차출은 총 세 번 있었다(1408년, 1409년~10년, 1417년). 그 중, 첫 번째 공녀에 속하여 그 중 첫째라고 하는 권씨는 영락제의 본처인 인효서황후(仁孝徐皇后)가 1407년 죽은 후 명나라에 공녀로 바쳐졌는데, 영락제는 권씨를 총애하여 현인비(顯仁妃)에 봉했다. 그래서인지 《명사 후비전》에 기록된 유일한 조선 여인이기도 하다. 영락제 사후에는 [[선덕제]]가 딱 한 번 공녀를 요구하였는데, 그 공녀가 바로 명나라 제8대 황제 [[성화제]]가 황태자였다가 폐위되었던 시절 지극정성으로 돌보아 준 것으로 유명한 [[공신태비 한씨]]이다. 이후에는 [[정덕제]]가 조선에 공녀를 요구하려고 하였으나 급사하는 바람에 사신이 요동에서 발길을 돌렸고, 그 후 조선에서 공녀 차출은 더 이상 없었다.([[https://lifeonmovietheater.tistory.com/43|관련글]]) 공녀라고 보긴 어렵지만 [[청나라]]의 [[아이신기오로 도르곤]]이 조선의 공주를 부인으로 들이고자 요구한 적이 있다. 이때 보내진 인물이 [[의순공주]]. 결혼 후 1년만에 도르곤이 사망하고 반역죄로 철퇴를 맞자 의순공주는 그의 조카에게 보내졌으나 그마저 사망하여 의순공주는 6년 후에야 조선으로 돌아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