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공녀 (문단 편집) === 고려 시대의 공녀 === 공녀 선발은 [[충렬왕]] 초부터 [[공민왕]] 초까지 약 80년 동안 정사에 기록된 것만도 50여 차례이다. 이곡의 공녀 폐지 상소를 보면 그 수효가 많을 때는 40-50명에 이른다 하니 끌려간 공녀들의 수는 2천 명을 넘었을 것으로 본다.[* 유홍렬, 「고려의 원에 대한 공녀」, 『진단학보』 18, 1957, 34∼37쪽] 그나마 이것은 공식적으로 기록된 것이고, 이 외 원의 사신이나 귀족·관리들이 사사로이 데려간 것까지 합치면 실제 숫자는 이보다 훨씬 많다고 한다.[* 권순형, 「원나라 공주와의 혼인 및 공녀」, 『한국문화사』 권1, 2005, 85~96쪽] 한 번에 공녀 500여 명을 끌고 가는 경우도 있었다.[* 『고려사 세가』, 충렬왕 2년(1276), 3월 29일자 기사 참조.] [[인신매매]]·[[인질]]·[[포로]] 등과는 약간 다른 개념이기는 하나, 공녀로 선발된 여성들의 입장에서는 평생 부모 형제와 헤어져 이역만리에서 궂은 일을 하며 일생을 보내는 것은 마찬가지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게다가 궁궐에서 중노동을 하고 결혼·이성교제가 금지되는 것에 더해, 언어 및 문화적 고충까지 덤으로 짊어져야 했다. 아무튼 공녀 차출을 피하기 위해 ([[기혼 여성]]은 대상에서 제외되었으므로) 딸을 [[조혼]]시키거나 숨기기는 예삿일이었고, 차출된 여자가 신세를 비관하다 [[자살]]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이 정도로 기피되는 일이었으면 힘이 없는 하층민 여자들만 공녀가 되었을 것 같지만, 공녀들 중에 이른바 좋은 출신의 여성을 포함해 보내도록 요구받았기 때문에 상류층 여자들도 공녀로 끌려가곤 했다. 심지어 출세를 위해 자발적으로 딸이나 여동생을 원나라 고위층에 공녀로 바치던 부원세력들도 있었다. 일례로, [[김경손]]의 손녀인 수령옹주(壽寧翁主) 김씨의 [[https://www.museum.go.kr/site/main/relic/search/view?relicId=4468|묘지명]]에 따르면 수령옹주는 딸을 공녀로 보낸 뒤 [[화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하지만 공녀로 끌려간 여성들은 대부분 같은 계층에 속하는 원나라 사람들과 결혼했고, 상류층 출신 여자들은 신분에 걸맞게 시집도 원나라의 상류층 집안으로 가서 부귀영화라면 부귀영화를 누리기도 했다. 공녀로 보내진 인물 가운데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간 것으로 유명한 [[기황후]]나, 원 혜종의 후궁이었다가 명 홍무제가 취해 홍무제의 후궁이 된 고려비 한씨 등의 사례가 있다. 물론 [[궁녀]]가 된 대다수 공녀들은 평민 집안에서 징발되었기에 많은 공녀가 평생 고향에 돌아오지 못한 건 물론 공녀에서 풀려나지 못해 원나라에서 대부분 궁중 시녀나 노비로 일생을 보낸 사람들도 많았다. 이에 대부분의 고려인들은 딸을 낳으면 비밀에 부쳐 이웃 사람도 볼 수 없게 하고, 딸의 머리를 깎는 등 공녀 선발을 면해 보려 노력하였다.[* 권순형, 「원나라 공주와의 혼인 및 공녀」, 『한국문화사』 권1, 2005, 85~96쪽] >고려 사람들은 딸을 낳으면 곧 감추고 오직 그 비밀이 탄로날까 두려워하여 이웃 사람들도 볼 수가 없다고 합니다. 원에서 사신이 올 때마다 놀라 서로 돌아보며 "무엇 때문에 왔을까, 처녀를 잡으러 온 것은 아닌가?" 합니다. >---- ><고려사절요> 中 [[충선왕]]이 1차 재위기간 이후 원나라에 끌려갔을 때에 어떤 궁녀와 얽힌 이야기가 전설로 전해져오는데, 어느 공녀 출신 궁녀가 가야금을 타면서 피를 흘리는 모습을 본 꿈을 꿨는데 하도 이상해서 그 궁녀를 찾았더니 고려에서 살았던 소녀로 봉선화 물을 들이면서 고국으로 돌아올 꿈을 품고 있었다. 그런 다음 궁녀는 가야금 음악으로 그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그는 그 궁녀를 생각하면서 조국으로 돌아오려는 간절한 꿈을 키운 결과, 무종이 왕위에 오를 때 크게 공을 세운 덕분에 다시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다음 궁녀에게 은혜를 갚으려고 불러오려고 했으나 이미 그 궁녀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왕은 궁녀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궁에 봉선화를 많이 심었다는 이야기가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