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공개처형 (문단 편집) === 공개형 === 일반 [[민중]]들 앞에서 [[정부]]나 해당 지역 통치자가 공개적으로 [[처형]](=[[사형]])하는 것. 많은 문화권에서는 [[마녀사냥]], [[인민재판]] 등으로 죄목을 공표&형 집행 혹은 [[조리돌림]]이나 낙인을 찍는 걸 병행해 범죄자의 명예를 더럽히는 걸 형벌로 삼았다. [[미국]]의 일부 주는 살인 피해자 유족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 중에 선발된 사람도 사형 집행에 참관가능하다. 사형제도를 가진 38개 주 중에 약 10여 개 주에서는 피해자와 관련이 없는 일반 시민 대여섯 명 이상이 반드시 사형집행에 참관하도록 법으로 정하고 있다. 이는 재판에 시민이 참여하는 [[배심제|배심제도]]와 마찬가지로 사형이라는 법의 집행과정에서도 시민들을 참여시켜 투명성을 보장하고 개인의 복수가 아니라 시민 사회가 범죄자를 공적으로 단죄한다는 명분을 삼는 제도이다. 법과대학원생, 신입경찰, 신문기자 등 다양한 계층이 참여한다. 참관인을 구하기 어렵기 때문에 가끔 신문 등에 사형참관인을 모집하는 광고가 나기도 한다. 사형수를 모욕하거나 잠재적 범죄자에게 겁을 주려는 의도는 아니므로 공개 처형으로 보기는 애매하다. 전근대에는 공개처형을 관람하는 것은 서유럽 성인들의 놀이문화였다. 당시의 인권 의식이 지금보다 부족한 탓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중세 시대에는 지금과는 달리 TV나 인터넷 및 영화도 없었고 사람들이 즐길 오락거리라고는 체육경기와 연극, 음악회 관람 수준으로 충분하지 않았으며, 그것도 일반 평민이 보고 싶다고 아무때나 볼 수 있던게 아니었기 때문에, 공개처형이 흥미로운 오락거리로 여겨진 탓도 있었다. 유럽인들은 [[극장]]에 가듯 처형장에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다녔다. 사형집행인의 이름과 그들이 어떻게 사형을 집행하는지 논의하며 아는 척하는 것이 매너로 여겨졌다. 중세 유럽에서 공개처형이 벌어지면,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서 즐겁게 구경을 하거나 도시락을 싸와서 처형을 관람하며 먹기도 하고, 심지어 사형수가 흘린 피에 빵을 적셔 먹거나 사형수를 다루는데 사용된 못을 빼가면 행운이 온다는 미신도 있었다. 유럽에서는 교수대와 사형 도구를 가리켜 '마셴카 교수대', '여윈 표클라(사형용 도끼)', 같은 애칭으로 불렀다. [[영국]]은 마셴카를 '리틀 메리'라고 불렀고, 사형용 도끼를 [[독일]]의 [[쾨니히스베르크]]에서는 '여윈 거트루트', [[아우크스부르크]]에서는 '빠른 알베르트'라고 불렀다. [[독일]]에서는 사형수를 목매달아 죽인 밧줄이 집안에 행복을 가져다 주고, [[프랑스]]에서는 사형수의 손을 가지고 있으면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게 해준다는 미신도 생겨났다. 1788년 영국에서는 사형당한 죄수에게 군중들이 달려들어 말 그대로 온기가 채 가시지 않은 시신을 부위별로 나누어 가진 사건도 있었다. 운이 좋았던 어느 [[선술집]] 주인은 사형수의 머리를 가져가 썩은 냄새가 나기 직전까지 자신의 가게에 걸어놓고 손님들을 끌어 모았다. [[프랑스]] [[파리(프랑스)|파리]]의 그레브 광장에서 벌어진 공개처형은 파리 시민들을 흥분시켰다. 그들은 사형 장면을 보면서 즐기고 노래하며 환호성을 질렀다. [[러시아]] 작가인 표트르 드미트리예비치 보보리킨은 1864년, 다음과 같이 말했다. >"파리에 반 년만 살면 알 것이다. '라 코케트' 감옥 근처에서 집행된 공개처형이 얼마나 잔혹한지! 이보다 더 잔혹한 장면은 상상할 수 없다. 호색가, 고급 [[매춘부]]와 퇴물, 바람둥이, [[도둑]], 도망간 유형수에 이르기까지 수천 명의 사람이 주변 술집에 모여 술에 취해 형편없는 노래를 불렀다. 새벽이 되어서야 사형수들이 매달려 있는 광장을 둘러싼 경비대쪽으로 다가가 이 소름끼치는 기구를 불렀다. 멀리서는 잘 보이지도 않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이 매혹적인 구경거리를 기다리며 사형장에 있다는 기쁨으로 환호하며, 즐겁게 밤을 지새웠다." [[프랑스 대혁명]]으로 인해 교수대가 [[단두대|기요틴]](거대한 칼날을 장착해 죄수의 목을 자르는 기계)으로 대체된 후, 프랑스인들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재미가 없어졌다면서 다시 교수대로 바꾸라고 요구했다. 이런 시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나폴레옹]] 시대와 [[부르봉 왕조]] 시대 이후, 프랑스의 사형 집행 기구는 다시 교수대로 바뀌었다. 파리에서 최후의 공개처형은 [[2차 세계 대전]] 바로 전에도 벌어졌다. [[소련]]의 배우, 알렉산드르 베르틴스키는 그가 사랑하는 파리의 광장에서 군중들이 소리지르고 즐긴 공개처형 장소에 있었다. 사형장면을 본 알렉산드르는 그가 본 참혹한 광경을 잊기 위해서 술을 마실만큼, 사형을 저속하게 평가했다. 그의 오랜 팬이었던 [[연미복]]을 잘 차려 입은 어느 신사가 다가와서 술집에서 그를 만나 같이 술을 마셨다. 이 신사는 그에게 공개처형은 예술활동에 좋은 것이 아니니, 더 이상 그런 구경거리에 가지 말라고 부탁했다. 알고 보니 이 신사는 파리의 공식 사형집행인이었다.[* 19세기 말 프랑스의 사형집행인들은 굉장한 지식인들이었다. 그 이유는 사형집행인이 갖춰야 할 자격 중 의사 면허가 포함돼 있었다고(...) 그래서인지 프랑스의 사형집행인들 중 사형제 폐지에 찬성하는 사람이 꽤 많았다고 한다. 어차피 본업이 의사라 사형제 없어져도 먹고사는 데 문제가 없기 때문.] 독립 이후 [[대한민국]]에서도 공식적으로 공개처형 방식을 채택한 경우가 있었다. [[국민방위군 사건]]의 주범이자 국민방위군 사령관인 [[김윤근(씨름)|김윤근]]을 비롯해 총 8명을 공개적으로 [[총살]]했다. 보통 비공개되는 사형집행이 공개처형으로 바뀐 까닭은 김윤근이 국방부장관이던 [[신성모]]의 사위이며 [[이승만]]의 신임을 받고 있었으므로 해외도주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었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