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공가 (문단 편집) == 역할 == 아무리 실권이 미약해졌다고는 하지만, 이 당시 일본에서는 얼마 안되는 고급교육을 받던 계층이었기 때문에 학문과 예술, 예법에 통달한 자들이 많았고, 이들을 초빙해서 가르침을 받은 사무라이와 다이묘들이 매우 많았다. [[센고쿠 시대]]부터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무렵의 일본에서는 한자만 알아도 엄청난 지식인으로 대접받았으며, 자기 이름 하나 쓸 줄 모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같은 사람이 무력만으로 일인자의 자리에 오르던 시대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당시의 사무라이들은 듣보잡 호족 세력이 군벌화한 경우가 많았으며, 심지어는 탈영병이나 부랑자 출신인 사람들도 많았다. 이런 사람들은 나중에 출세를 하더라도, 뼈대 있는 무가 가문들[* 일본 역사상 가장 먼저 득세했던 [[미나모토|미나모토 가문]]이나, [[타이라 가문]]은 아예 [[천황]]가의 먼 방계 후손들이었으므로, 사무라이들 사이에서는 [[성골]]이나 [[진골]] 같은 대접을 받았다. [[우에스기]] 가문 같이 대놓고 공가 출신인 다이묘도 있었다.]에 비하면 혈통상의 이유로 열등감을 느끼곤 했다. 이런 상황에서 각종 학문과 예법을 어릴 적부터 수련해 왔던 공경들은 자연스럽게 상당한 대접을 받았다. 즉, '''전국시대 [[셀럽]]'''. 종종 다이묘들에게 고용되어 [[책사]] 노릇을 맡은 공경도 있었다. 공가는 그런 사무라이들의 가문 세탁을 위한 아주 좋은 옵션이 되기도 했다. [[전국시대(일본)|전국시대]]의 [[다이묘]]들은 어떻게든 권력을 얻은 뒤에는 명문 무가나 공가의 방계 후손을 사칭하는 것이 기본이었으며,[* [[오우치]] 같은 일부 예외를 제외한 대부분의 다이묘는 천편일률적으로 겐페이토키츠([[미나모토]], [[타이라]], [[후지와라]], [[타치바나]])를 사칭했다.] 나중에는 공경의 [[데릴사위]]나 [[양자(가족)|양아들]]로 입적함으로써 최종적으로 세탁을 완료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미천함과 근본없음의 대명사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고노에 가문의 양자로 들어가는 꼼수로 지위를 빌어 일본에서 가장 고귀한 관직인 [[관백]]에까지 취임했으며 그 권위로 일본을 다스렸다. [[오닌의 난]]처럼 극심한 환란이 아닌, 적당한 난리통이 지속되는 경우 각지의 유력자들이 조정의 권위를 빌어보기 위해서 [[천황]]과 공가에 꽤 많은 재물을 상납했기에 교토 조정은 상당히 부유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일례로 [[서일본]] 최대 다이묘이자 [[백제]] 태자의 후손을 자칭했던 [[오우치]] 가문의 경우 조정 관직을 얻기 위해 무려 '''[[황금]] 2000냥'''을 진상한 적도 있다.[* [[이와미 은광]]을 차지하고, [[주코쿠]]와 [[규슈]] 사이의 주요 무역 거점을 차지하고, 조선과도 수백 년 동안 독자적으로 통교하고 있어서 부유했기 때문이다. 전국 시대 다른 어지간한 다이묘들이 보통 크게 내봐야 황금 200냥, 진짜 많이 내봐야 황금 500냥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금액이었던 셈.] 에도 막부 초기에는 개별 다이묘들이 사사로이 조정에 상납금을 주고 조정 관위를 받는 행위를 금지시키기도 했지만, 에도 막부 중후기 이후에는 오히려 에도 막부 측에서 다이묘들이 적절한 조정 관위를 받도록 권유하기도 했다. [[에도 막부]] 시기부터는 공가의 중요도가 다소 떨어졌다. 전란과 하극상의 시대가 끝나면서 더 이상 여러 공가에게 무가의 정치적 파트너가 될 기회가 두루 돌아가지 않게 되고, 막부가 파트너로 선택한 [[오섭가]]만이 그 지위를 독점하게 된 것이다. 더욱이 국가적 안정기가 길어지면서 공가를 대접하고 선망해야 하는 '무식한 사무라이들'이 더 이상 배출되지 않게 되었다. 사무라이가 칼질로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라 사무라이 집안에서 태어나야만 될 수 있는, 말만 "무가"이지 사실상 제2의 귀족 계층으로 정착해버린 것이다. 무사 계층의 학식 수준도 높아져서 [[유학]][* [[아메노모리 호슈]]나 [[미토 코몬]]처럼 유학자를 겸하는 사무라이가 나타났다.]과 [[난학]]을 공부하고 책을 번역하는 사무라이가 나타날 정도였다. 하지만 어려운 전통 예법이나, 천황을 비롯한 황족들에 대한 의례를 제대로 아는 이는 공경들뿐이었으므로, 공가 출신자들은 사무라이들의 전속 예절 교육 강사 노릇을 하는 등, 여전히 무사들의 흠모를 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