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골품제 (문단 편집) == 변화 == 이런 폐쇄적 신분제도의 영향으로 [[선덕여왕]] 대에는 성골 [[남자]]의 씨가 말라버렸고 이 탓에 신라 최초로 [[여왕]]이 즉위하게 되었다. 이후 선덕여왕의 사촌 [[진덕여왕]] 이후 최초로 진골 출신 [[태종 무열왕|김춘추]]가 왕위에 오른다. 그 후로는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300여년간 줄곧 진골들이 왕위를 잇게 된다. 수능이나 한능검을 공부한 이들은 알 수 있겠지만, 신라의 역사가 길어짐에 따라 왕족의 수도 꾸준히 많아지다보니 진골의 개념도 다른 왕조의 일반적인 왕족이라는 뜻보다는 '''일반 귀족 중 최상위 클래스'''라는 의미에 가까워졌다. 단적인 예가 신라 후대 왕위를 장악하는 [[내물 마립간|내물왕]]계열의 진골 귀족들이다. 통일 신라 하대에 임금 자리를 놓고 피 튀기는 싸움을 벌인 무열왕계와 내물왕계는 모계로는 9촌의 관계지만 직계로는 세대를 추정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멀었다. [[혜공왕]]은 [[지증왕]]의 10대손, [[원성왕]]은 [[삼국유사]]에 따르면 지증왕의 8대손이므로 혜공왕과 원성왕은 최대 '''18촌'''이다. 이 정도면 통혼해도 근친혼으로 보지도 않을 수준. 때문에 이후 시대라면 그냥 남남이나 다름없고 전혀 경쟁관계가 성립할 수 없다. 그 숫자도 진골이 다른 왕조의 왕족보다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무열왕계가 대권을 쥐고 있을 당시에는 왕권 강화와 진골세력들을 견제하기 위해 [[강수]] 등 6두품 출신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하기도 했으나, 내물왕계가 왕위에 오르고 무열왕계가 권력의 중심에서 떨어져 나와 6두품으로 강등됨과 동시에 왕권도 약해지면서 이런 노력들은 끝내 물거품이 되고 만다. 그 결과 강력한 권력을 지닌 진골 귀족 간의 치열한 왕위 다툼으로 번지게 되었다. 최후의 승리자인 원성왕마저 정작 자신이 임금이 되고 나선 무열왕계가 부딪혔던 현실을 뼈저리게 인식한 나머지 진골들의 횡포를 막고 6두품 세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온갖 정책들을 고안해냈을 정도로 왕권 신장에 열을 올렸다. 그나마 신라의 체제를 골품제의 한계 내에서 나름 어떻게든 손질해서 후세에 물려주는데까지는 갔지만, 끝내 [[장보고]]의 성장이 신호탄이 되어 그 다음 원종과 애노의 난을 시작으로 골품제 탓에 쌓인 신진 지방 세력들의 분노가 결국 [[후삼국시대]]의 등장으로 이어지게 된다.. 골품제 자체는 원래의 통일신라 영토만 한정하면 무색해졌다고 하지만, 이미 통일신라의 영역 자체가 해가 갈수록 크게크게 줄어드는 판국에서 이런 얘기는 나름 일리는 없진 않되 진지한 이론으로 보긴 어렵다. 여하튼 신라의 힘이 미치는 지역 내에서 골품제는 견고했으니까. 또 다른 우스개를 들어보자면 이 상황에서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진골들과 6두품들의 비중은 대단히 높아져서 역설적이게도 신분제 자체의 모순은 쇠퇴 일로에 있는 신라 기준으로 봐도 상대적으로 나아졌다고 볼 수 있는 상황이 된다. 5두품 이하는 말할 것도 없고, 신라 왕실의 말을 듣지 않는 진골들과 6두품들이 죄다 신라에서 빠져나가 버렸으니. 그러나 이것도 어디까지나 그냥 하는 우스개지 진지한 이론은 아니다. > [[신라]]에서는 사람을 등용하는데 골품을 따진다. 때문에 진실로 그 족속이 아니면 비록 큰 재주와 뛰어난 공이 있더라도 넘을 수가 없다.[* 이 말을 남기고 [[설계두]]는 621년에 당으로 건너가서 20여년 후 [[고구려-당 전쟁]] 때 당군에 종군하여 [[주필산 전투]]에서 고구려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 ---- > 《[[삼국사기]]》 열전 제7 [[설계두]]전. 사실 세부적으로 따지자면 관등은 외위제(外位制), 즉 중앙의 골품과 지방의 골품을 차별하는 제도에 근거해 옛 [[고구려]]의 지배층에는 7등급, [[백제]]의 지배층에는 11등급 이상의 벼슬을 제한하는 차별적인 정책을 실행한 것도 치명적인 실책이긴 했다. 골품의 경우 고구려계는 6두품, 백제계는 5두품으로 그 골품의 상한선을 제한시켰다. 실제로 망국의 옛 지배층들이 벼슬길에 오른 기록도 별로 없고, 중앙 경주의 진골이나 6두품만이 대부분의 중요 직책에 오를 수 있었다. 사실 [[통일신라]] 이전 [[삼국시대]] 때의 신라에서는 의외로 지방민 대접이 (당시 기준으로는) 괜찮았는데, [[단양 신라 적성비]]나 [[삼국사기]]의 여러 열전에서 지방민들이 신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남은 가족들이 경위를 받고 좋은 대우를 받는 기록이 여럿 있다. 적어도 신라와 국경을 맞대고 경쟁하는 고구려나 백제의 지방민 대우에 비해 크게 딸리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신라의 지방민 차별이 3국 중 혼자만 특별히 더 심했다면 국경지대의 지방민들이 당연히 신라를 버리고 고구려나 백제에게 협력하지 신라에 목숨을 바칠 이유가 없었을테니. 고구려나 백제뿐 아니라 비슷한 시기의 중국이나 일본도 좀 더 강고하고 느슨한 차이는 있을지언정 출신 가문만으로 많은 것이 좌우된다는 측면에서 비슷한 개념은 다들 존재했다. 중국의 경우 [[문벌귀족(중국)]] 문서로. 심지어 일본은 신라 멸망 후 900여년이 지난 [[19세기]]까지도 출신 가문에 따라서 조정에서 관직 진출의 상한선이 공식적으로 있었다. 헤이안 시대 말기와 가마쿠라 막부 시대를 거치면서 무사와 지방호족들이 중앙귀족들의 권력을 압도하면서 갑을관계가 역전되었지만, 이름값은 있었기 때문에 명성을 얻을려는 무사들은 귀족들의 양자로 들어가려는 식으로 작위를 얻을려고했으며, 얼마 안 되는 예외가 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인데, 명문가의 양자로 들어가는 형태로 우회했다. 그러다 [[삼국통일전쟁]]을 거치면서 공을 세우는 지방인이 많아지면서 그들의 지위가 향상되었고, 이들이 특례로 경위를 지급받는 경우가 늘어나 경위와 외위의 구분이 점차 없어졌고, 외위는 674년([[문무왕]] 14년)에 폐지됐다. 일단은 예전엔 귀하던 경위를 지방민들도 똑같이 받게 된 것이지만, 모두가 받으니까 기존의 희소성은 사라지게 된다. 고대 중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진나라에서는 전국민에게 20개 등급의 작위를 할당하는 [[이십등작]] 제도가 있었다. 원래는 아무나 받을 수 없었던 [[이십등작]]을 [[전한]] 때 막 뿌리다보니, 사람들이 너무 흔해진 작위에 별 가치를 두지 않게 되어서, 전한 후기쯤 가면 20등작 중 가장 높은 관내후와 열후 정도나 이름이나 남지 그 외에는 취급도 안 해주게 된다. 그리하여 외위에서 경위로 올라가는 일종의 신분 특진이 사라졌는데 새로운 신분상승 제도는 없으니 완전히 고착화된 것이다. 외부 인사로 신라에서 최상급인 진골을 받은 것은 기록상 3가지 경우였다. 물론 기록 누락이나 다른 이유로 더 있었는데 기록이 남지 않았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대가야]]의 마지막 군주인 [[도설지왕]]도 [[단양 신라 적성비]]나 [[창녕 진흥왕 척경비]]에서 8위 [[사찬]]에 오른 기록을 통해 진골 혹은 6두품을 받은 정황을 볼 수 있지만, 결국 진골만이 승진 가능한 [[대아찬]] 이상의 관등까지 오르지 못한 채 기록에서 사라졌기에 진골인지 불확실하다. [[도설지왕]] 문서로. 외부 인사로서 진골을 받은 경우는 다음과 같다. [[금관가야]]의 왕실이 [[구형왕]]의 항복 이후 진골에 편입되었는데 구형왕은 최고 관직인 [[상대등]]이 되었고, 이것이 [[김유신]]의 가문이다. 그리고 고구려 부흥운동을 벌이던 고구려 왕족 출신 [[안승]]이 신라에 귀순해 [[보덕국|보덕국왕]]의 직책을 받으면서 진골이 된다. 마지막으로 [[고왕|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한 이후 신라에서 사신을 보내는데, 이 때 신라가 사여한 벼슬이 [[대아찬]]으로써 진골의 품계이니 대조영을 진골로 인정한 경우가 된다. 다만 마지막은 명목상으로 그렇다는 것이고, 안승 가문은 이후에 반란 일으켰다가 아작났다. 안승 본인이 어떻게 됐는지는 명확한 기록이 없다. 그리고 평민 출신으로 진골이 된 [[소나(신라)|소나]]가 있는데 이는 전쟁에서 고군분투하다 전사한 후 진골인 [[잡찬]]이 추증된 경우지만 이런 경우는 소나가 유일무이하다. 애초에 골품제도는 신라의 왕경인 [[서라벌]] 즉, 지금의 경주시 지역만을 대상으로 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 학설에 따르면 철저한 수도 중심편제가 된다. 대등들이 참석하는 [[화백회의]]는 사실상 종친회의였다. 그나마 신흥 세력이라는 김유신&김춘추 계열도 일단 진골은 진골이다.[* 남아있는 기록으로 추정하건데 평민이라 하더라도 수도에 산다는건 지금의 북한처럼 일종의 특권으로 여겨졌을것으로 추정이 된다. 일례로 전쟁에서 활약하여 전사한 국가유공자의 유가족에게 서라벌에서 살수 있게 허락한걸 일종의 포상으로 주어졌다.] 심지어 [[당나라]]에서 [[과거]][[시험]]에 합격하고 온 [[최치원]]조차도 6두품이라는 신분 때문에 한계에 부딪쳐야 했다. 최치원이 쓴 시무 10조를 [[진성여왕]]은 눈여겨봤지만 결국 진골 귀족들에 의해 무시당했고 그 일로 완전히 좌절한 최치원은 관직에 물러나 은거하게 된다. 사실 시무 10조 중에 진골귀족의 세력을 무너뜨리는 것이 포함된 것을 생각하면 강제로 '은거당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최치원에게 6두품의 한계가 있기는 했으나, 이것만으로 최치원의 말년을 평가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단적으로 최치원이 시무 10조를 올린 것은 [[진성여왕]] 시절로, 이후 최치원은 6두품의 한계인 [[아찬]]까지 승진했다. 그리고 최치원이 벼슬을 물러난 것은 [[효공왕]] 시절로, 이 와중에도 [[진성여왕]]의 양위와 [[효공왕]]의 즉위를 당나라에 알리는 국서를 작성하는 등 할 건 다 했다. 자세한 것은 [[최치원]] 항목으로. 어느 정도 지방에서 세력을 잡고 있으며 실력도 있었지만 승진이 제한되던 6두품 층에서 항의를 많이 했으며, 나라 망치는 제도라고 없애려는 시도가 많았지만 기득권을 차지하고 있는 진골 귀족들이 그렇게 할리가 있겠는가? 결국 중앙의 통제력이 약해지는 신라 하대부터 중앙의 통제가 미치는 경주 일대를 제외하고 제대로 먹혀들지 않게 되었다. 덕분에 진골들에게 차별받던 신진 지식층인 6두품들이 호족과 군벌들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하도록 만들어, 신라 멸망의 으뜸가는 원인이 되었다. 신라를 흡수한 왕건의 아버지가 송악군 사찬 즉 6두품이었다. 물론 중앙귀족이 아니기에 지방세력가에게 6두품 취급해준것으로 보인다. 골품제는 결국 신라가 망하고 나서야 완전히 없어졌다. 왕족-호족-양민-노비의 4원 체제는 딱히 없어지지 않았지만, 골품제보다 신분의 유동이 비교적 활발했다. 반면 골품제의 진골 신분 경우에는 집권층끼리 싸우다보니 [[내려갈 팀은 내려간다|내려갈 일은 있었을지언정]] 올라갈 일은 통일신라 이후로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통일신라 이전에 왕통을 잇는 성골의 단절만 놓고 봐도, 골품제는 왕위 계승과 관련하여 폐쇄성이 심하게 두드러졌다. 성골의 소멸 이후 진골이 왕실 혈통으로 맥을 이었지만, 그마저도 진골 내에서 분화가 일어났다. 8세기 중후반 이후 왕실과 혈연적으로 멀어진 진골층이 두품층처럼 관료층으로 변화하였고, 진골세력 간 다툼이었던 왕위쟁탈전에서 공을 세운 6두품은 아찬 중위제의 제약을 넘어선 관등을 받았다. 이렇게 왕실에서 멀어진 진골과 6두품 중 공을 세워 아찬보다 높은 관등을 받은 자들은 득난(得難)이라는 새로운 신분 계층을 형성하였다.[* 득난이 6두품의 다른 이름이라는 견해도 있다.] 9세기 말이 되면 진골은 규모가 작아진 왕족을 넘어서 왕실만 지칭할 정도로 그 범위가 상당히 축소되었다. 왕통과 연결된 최고 귀족들이 자멸해서 사라지는 진귀한 기록을 남겼으니 어떻게 보면 막장이다. 스파르타도 1계급이 사라질 것 같으니까 다른 계급에서 인구를 가져왔다. [[남녀차별]]은 어쨌든 전근대시대에는 보편적인 개념이었지만, 신라는 그것도 뛰어넘어서 성골 여자가 진골 남자보다 군주감으로 낫다고 볼 정도. [[비담의 난]]도 표면상의 이유는 남자가 아닌 [[여왕]]의 통치를 반대한다는 것이었지만, 골품제의 모순이 근저에 자리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골품제는 신라의 왕권강화에 지대한 역할을 했으며, 귀족 세력의 힘을 충분히 억제하여 나름의 중앙집권화에 이바지 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어쨌건 신라 초기에는 소수 귀족층의 강한 결집을 통해 외부의 적에 대항하는 순기능을 발휘했으며 신라를 신라답게 만든 특색이기도 하다. 당장 신라와 경쟁했던 고구려와 백제는 신라에 비해 신흥귀족과 지방호족들이 중앙정계에서 활약하기는 수월했지만,[* 이를 반영한것이 [[을파소]]에 관한 기록들과 [[온달]]설화다. ] 그 대신 내분이 일어나는 빈도가 당시 신라보다 훨씬 잦았다. 특히 백제의 경우에는 왕권강화를 위해 왕비족을 다변화하는 식으로 귀족가문들의 힘을 분산시키려했지만, 이는 성공적이지 못하여 정변이 자주 일어나는 등 취약성이 강했고, 고구려는 백제수준으로 왕권이 취약한것은 아니었지만 642년의 정변 이후로 보장왕이 연개소문의 도움으로 왕이 되면서 [[연개소문]]을 비롯한 연씨 가문이 실권을 가져가는 형태로 국가가 운용되었는데 연개소문 생전에는 당나라를 막는데 도움이 되었지만, 연개소문이 사망한 이후로 보장왕이 연씨일가의 내분을 통제하지 못하면서, 결국 고구려가 멸망되었고, 고구려와 백제 부흥운동 실패까지도 권력층의 내분이 컸다. 고구려에서 배타적인 의식의 흔적이 나타나는데 [[https://www.humanity.kr/494]] [[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2512]] 신라에서는 이와 같은 일이 적었다. 신라는 [[비담의 난]] 등 몇몇 사건 외에는 상대적으로 내분으로 나라가 격렬하게 흔들린 경우는 적었고, 막대한 군공과 군권을 쥔 [[김유신]]을 본국에 남겨두고 김춘추가 고구려, 일본, 중국을 직접 바다를 건너 왔다갔다할 정도로, 권력구도가 안정돼 있고 권력자들 간에 상당한 신뢰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외부의 직면한 적이 사라진 [[통일신라]]시대 이후 몇백년을 거치면서 사회의 역동성을 잃고 본격적으로 모순이 드러나 망국으로의 길을 재촉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즉 계엄령처럼 전시에는 훌륭한 내부 단속 체제였지만 전시가 끝나고도 해제하지 못하여서 오히려 독이 된 것이다. 비슷하게 전시 기구를 해체하지 않아서 국가에 부담을 준 제도는 조선시대의 비변사가 있다. 비변사가 최고 국정운영기관이 됨으로 비변사를 장악한 소수관직만 자신의 편으로 만들면 국정장악이 가능해지면서 조선의 관료제가 제기능을 못하게 만들었다. 국가의 내재된 능력으로 체제를 바꿀 수 있었다면 900년을 넘는 것으로 알려진 신라의 역사가 더 오래도록 이어질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 어쨌든 이렇게 개혁을 거부하고 골품제도에 집착해온 신라는, 결국 후삼국시대에 가서 나라 전체가 후백제와 후고구려, 고려, 기타 호족 세력들로 갈라지게 된다. 후삼국 분열 이후 이들에게 영토들을 다 뜯기게 된다. [[후삼국시대]]에 이르러서는 뒤늦게나마 골품제의 벽을 일부 개방했다는 주장도 있다. [[부산대학교|부산대]] 전기웅 교수는 [[소판]] 왕지본, [[잡찬]] [[소충자]] 등 성씨로 보아 진골이 아닌 후삼국시대의 지방세력가가 진골의 관등을 가지는 것들이 자칭이 아니라, [[진성여왕]]대에 지방 통치 제도를 개혁하면서 [[도독]]과 [[태수]]를 파견하는 통일신라식 직접 통치 대신 지방의 실력자를 지주제군사로 임명하고 명목상 인정하는 당나라식 간접 통치로 전환하고 그 지주제군사에게 진골의 위계를 정식으로 수여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는 당나라 유학 당시 [[고병]] 휘하에서 지주군주사를 충분히 경험한 [[최치원]]의 제안이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았다. 최치원은 자신의 저작에서 당의 지주군주사 제도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적이 있다. 다만 신라 멸망까지 완전한 개혁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 통설이고, 이런 해석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이미 너무 늦었던 것이 문제. 결정적으로 927년 견훤의 경애왕 시해로 신라 조정의 위상이 더욱 떨어진 상황에서 930년 [[고창 전투]]로 인해 미묘하게 유지되던 균형이 깨지고 대세가 고려로 정해지자, 그나마 남아있던 경상도 일대의 친신라적 호족들이 죄다 고려에 항복해 버려 실효 지배 영역이라고는 수도 서라벌 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대부분의 국내 역사 교과서나 한국사 관련 서적에 실린 후삼국시대의 신라 지도들을 보면, 경상도를 제외한 대부분의 한반도 영토들을 잃고 수도 서라벌과 경상도 일대들만 통치하는 면적으로 그려져 있는데, 이것도 후삼국시대 초중기의 이야기지, 후삼국 시대 후기 약 5년간은 수도 서라벌(현 경주 시)을 제외한 다른 경상도 지역 영토들마저 지방 호족들과 후삼국들에게 모두 빼앗기고 한반도 내 주도권을 고려가 완전히 차지하게 된 이후에는 수도 서라벌만 지배하는 더 조그마한 소국으로 전락했다. [[경애왕]]은 전장도 아닌 수도 경주의 포석정에서 후백제군의 침공을 받아 살해당하고, 후백제군에게 살해당한 경애왕의 뒤를 이은 [[경순왕]]은 더 이상 나라를 유지할 수가 없어 결국 신라를 통째로 넘기고 경주의 [[사심관]] 자리를 얻음으로서 신라 천년 역사의 종지부를 찍는다. 이 사심관이란게 사심관제도를 보면 알겠지만 말이 관리이지 실상은 현지의 폭동을 막기위한 볼모내지 인질의 의미에 가깝다. [[후한]]의 관내후와 동일했는데 실제로도 [[조조]]는 [[마초]]의 반란을 막으려고 [[마등]]에게 관내후 자리를 주게 하여 인질로 잡아두고 있었다 그래도 [[고려시대]]에 신라 왕실 본가는 상당한 대우를 받았다. 고려 왕가의 [[중시조]]인 [[현종(고려)|현종]]부터가 신라 왕실의 혈통을 가진 인물이다. 하지만 신라 왕실 출신 이외에 정신 못 차리고 골품제를 고수하던 진골 귀족들 같은 경우, 고려시대에 일단 경상도 일대의 [[향리]]로서 나름대로의 기득권은 보장받을 수 있었으나, 시류를 약간 잘 타서 조금 일찍 고려의 관리가 된 엣날의 6두품들 앞에서 대단히 입장이 깎이는 수모는 참아야 했다. 과거 신라 왕실의 일원이자 귀족의 최고점으로 어딜가나 대접받으며 수도에서 떵떵거리던 진골 귀족들이, 이젠 고려 3경이라고는 해도 지방의 대도시 정도로 격하된 경주에서 대접받는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개경 중앙 귀족의 눈치를 봐야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김원충]], [[김경용]]처럼 고려 치하에서도 옛 신라의 진골 귀족들이 [[문벌귀족]]으로 성장하기도 했고 [[김부식]]의 조상인 [[김위영]]처럼 경주에 남아서도 명문가 지위를 유지한 케이스도 있었지만 모든 옛 진골 귀족이 김부식 가문처럼 현달하지는 못했다. 아무리 고려가 호족연합국가적인 면모에 귀족 국가였다고 해도, 지방 호족이 된 과거 진골들은 중앙 정계에 진출한 경주 최씨 등 과거의 5~6두품들에 비해서는 딸리는 입장이었다. 경주에 남아 향리가 된 자들의 이러한 불만은 결국 [[신라부흥운동]]으로 표출되지만, 고려 정부의 철저한 탄압을 받아 부흥운동의 주동자들 상당수는 처형되거나 유배되거나 참살당하면서 고려 왕조 시대에 일어났던 신라부흥운동은 실패로 끝난다. 단 모든 신라 진골이 이런 길을 걸었던 건 아니다. 신라 진골들도 시대가 가면 계층이 분화되어 상당수는 고려의 문벌귀족 가문으로 진입하고 그러지 못했던 가문은 [[김부식]] 가문 등 일부 명문가를 제외하면 중앙 권력과 멀어진 지방 향리로 전락하게 되었다. 전자와 후자의 비율이 어떠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대체로 후자의 경우가 많았을 거라고 짐작할 뿐. 이들의 불만은 결코 가볍게 볼 것이 아니며, 부흥운동은 먼 훗날의 누군가가 '당위성'이라고 부르는 것과는 영 거리가 먼 원인에서 탄생함을 눈여겨 봐야 한다. 고구려와 백제, 발해의 부흥운동의 입장에서 외세는 당나라나 거란 뿐만이 아니라 신라 또한 외세 중의 하나였다. 같은 삼한 중 하나란 인식은 있었으나, 여하튼 외국은 외국이었던 것. 경순왕이 평화적으로 나라를 바치고 투항하면서 평화롭게 고려에 흡수되었으나, 기득권을 빼앗기면서 대대로 하위층으로 내려앉은 진골들이 과연 이러한 것을 납득할 수 있을리가 없다. 이들은 신라 멸망 이후로 옛 신라 지역 출신 고려인들 중, 고려 왕조에 대한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는 부류가 되었기에 망한 나라를 꼭 부흥운동을 일으켜서 되살려야 된다는 당위성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건 후세인의 입장에서 보는 당위성 운운 문제가 아니라, 고려는 신라와는 달리 체제에 충성하는 지방민을 조직적으로 육성해서 진압이 상대적으로 쉬웠고 신라는 그러지 않았다는 차이였을 뿐. 이러는 와중에 최씨 무신정권 이후로 무신정권의 막바지까지 김양경, 김경손, 김방경같은 신라 왕족 후손들의 분전도 있었는데 김양경은 강동성 전투로 대활약하고 김경손은 귀주성전투로 횔약하고 김방경은 몽골군, 삼별초군, 일본군과 전투로 대활약을 펼쳤다. 하지만 김경손은 숙청당해 죽은 비운의 장군이 되었고, 김방경은 모진 고초 속에서 장수한 장군이 되었다. 김양경 또한 조충과 더불어 홀대받은 문관 중 하나이다. 필사본 [[화랑세기]]에는 [[미실]]과 관련해서 좀더 복잡한 사정이 나오는데,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으로. 필사본 화랑세기라는 물건 자체가 위서 의혹이 있어 주류학계에서는 배제된 상태다. 화랑세기를 참고한 드라마인 [[선덕여왕]]에서도 이 골품제 관련 묘사가 나오는데 천하의 미실조차도 성골 신분을 내세운 즉위전 선덕여왕에게 어디 감히 성골의 몸에 손을 대느냐는 일갈을 당하고도 아무 말 못하는 수모를 당한다. 창작물에서 골품제의 문제점을 집중적으로 부각한 것으로 [[화랑(드라마)|드라마 화랑]]이 있다. 비록 물질적 고증은 완전히 포기한 드라마지만, 골품제에 관해서는 상당히 비중이 큰데 서로 다른 골품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은 반쪽으로 불리며 차별을 받는 등의 묘사가 많이 나온다. 다만 드라마 후반부에 주인공 무명이 사실은 성골이었다는 부분은 골품제 시스템상 설정오류다. 휘경공은 다리에 장애가 있어 성골에서 족강당했다는 설정인데, 휘경공이 이미 성골이 아니므로 휘경공의 아들인 무명도 성골일 수가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