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골품제 (문단 편집) === 초창기 === || 〈[[포항 냉수리 신라비]]〉의 하교자 명단 (서기 [[503년]]) || 〈[[울진 봉평리 신라비]]〉의 하교자 명단 (서기 [[524년]]) || ||<^|1><(>사탁부 [[지증왕|지도로 갈문왕]](至都盧 葛文王) 사탁부 사덕지 아간지(斯德智 阿干支) = 아찬 사탁부 자수지 거벌간지(子宿智 居伐干支) = 급벌찬 탁부 이부지 일간지(尒夫智 壹干支) = 일길찬 탁부 지심지 거벌간지(只心智 居伐干支) = 급벌찬 본피부 두복지 간지(頭腹智 干支) 사피부 모사지 간지(暮斯智 干支) ---- ||탁부 [[법흥왕|모즉지 매금왕]](牟即智 寐錦王) 사탁부 [[입종 갈문왕|사부지 갈문왕]](徙夫智 葛文王) 본피부 무부지 ▨간지(巫夫智 ▨干支) 잠탁부 미흔지 간지(美昕智 干支) 사탁부 이점지 태아간지(而粘智 太阿干支) = 대아찬 사탁부 길선지 아간지(吉先智 阿干支) = 아찬 사탁부 일독부지 일길간지(一毒夫智 一吉干支) = 일길찬 탁부 물력지[* 거칠부의 아버지] 일길간지(勿力智 一吉干支) = 일길찬 탁부 신육지 거벌간지(愼肉智 居伐干支) = 급벌찬 탁부 일부지 태나마(一夫智 太奈麻) = 대나마 탁부 일이지 태나마(一尒智 太奈麻) = 대나마 탁부 모심지 나마(牟心智 奈麻) = 나마 사탁부 십사지 나마(十斯智 奈麻) = 나마 사탁부 실이지 나마(悉尒智 奈麻) = 나마|| 포항 냉수리비(503)와 울진 봉평리비(524)는 판결문으로, 포항 냉수리비는 어느 지방 유력자의 재산분배 판결을 담고 있으며 울진 봉평리비는 북변 요충지 거벌모라에서 발생한 실화(失火)로 인해 빚어진 요소에 대해 현지 유력자를 문책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사건을 판결한 하교자의 명단으로 포항 냉수리비는 당시 사탁부의 [[지증왕|지도로 갈문왕]] 및 6인이 하교자이며 울진 봉평리비는 탁부의 [[법흥왕|모즉지 매금왕]]과 사탁부의 [[입종 갈문왕|사부지 갈문왕]] 및 12인이 하교자다. 이때 하교자들 중 가장 지위가 높은 건 탁부의 매금왕과 사탁부의 갈문왕이며 하교자의 다수가 탁부와 사탁부라는 점에서 당시 탁부와 사탁부가 6부의 주도권을 쥐었음을 보여준다. 포항 냉수리비에서는 사탁부의 지도로 갈문왕이 신라 왕인데 왜 이후 울진 봉평리비에서는 탁부의 모즉지 매금왕이 신라 군주냐는 의문이 제기된 바 있다. 이에 대한 학계의 설은 본래 마립간이 탁부의 매금왕이었지만 지도로 갈문왕이 사탁부의 갈문왕으로서 6부의 수장 자리를 빼앗고 이후에는 신라 6부를 초월한 대왕이 되었다는 것이다. 지증왕 사후 두 아들이 탁부의 모즉지 매금왕과 사탁부의 사부지 갈문왕이 되었고 사부지 갈문왕의 아들이 [[진흥왕]]이다. 이때 비석의 특징은 반드시 소속 부를 명시한다는 점이다. 이때 신라는 아직 중앙집권이 안 돼서 해당 부가 중시되었기 때문이다. 이때 하교자 명단에서 매금왕과 갈문왕을 제외한 나머지 하교자들 중 탁부와 사탁부가 1대 1의 대칭을 이루고 있는데 이는 당시 탁부와 사탁부가 6부의 실세로서 균형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부체제는 연맹왕국 같지만 명백히 서열이 나누어지고 가장 강한 부의 대표가 나라의 군주였다. 이는 3세기 고구려가 5부였음에도 왕위는 소노부에서 빼앗아간 계루부가 독점한 점에서 드러난다. 포항 냉수리비가 세워진 시점(503년)은 아간지(아찬)가 최고였고 울진 봉평리비가 세워진 시점(524년)에 와서 아간지의 상위로 태아간지(대아찬)가 분화되어 최고 관등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를 보아 법흥왕 때까지 17관등은 완성되지 않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其官名, 有子賁旱支·齊旱支·謁旱支·壹吉支·奇貝旱支. >(신라의) 관직 이름에는 [[이벌찬|자분한지]](子賁旱支), [[잡찬|제한지]](齊旱支), [[아찬|알한지]](謁旱支), [[일길찬|일길지]](壹吉支), [[급찬|기패한지]](奇貝旱支)가 있다. >---- >《[[양서(역사책)|양서]]》 권54 〈신라열전〉 中 그러나 중국 측 사서인 [[양서(역사책)|양서]]에서는 이미 6세기 전반에 [[이벌찬]]을 비롯한 몇몇 고위 관등이 완성되어 있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 등장한다. 양서에 실린 신라 관련 정보는 [[521년]] 양나라에 파견된 신라 사신을 통해 얻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상술한 울진 봉평리비가 건립되기 불과 3년 전이다. 이는 언뜻 보기에는 봉평리비의 내용과 상충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해당 비문에서는 교시를 내린 인물들의 관등을 기록하고만 있을 뿐 대아찬이 최고 관등이라는 직접적인 언급은 하지 않았다. 따라서 법흥왕 대의 최고 관등에 관해 섣불리 단정지을 수만은 없는 셈이다. 하지만 양서의 기록 역시 [[이찬]]과 [[파진찬]]에 해당하는 관명은 기록하고 있지 않으므로, 법흥왕 치세에 관등 체계가 완성되었다 보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여러 정황들로 미루어 보아, 17관등의 등장은 골품제와 연관이 깊으므로 [[진흥왕]]~[[진평왕]] 시기 사이에 같이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금석문 상에서 이찬, 파진찬에 해당하는 관등은 [[550년]]경에 건립된 〈[[단양 신라 적성비]]〉에서부터 나타나며, 이벌찬과 잡찬은 [[561년]]에 설치된 〈[[창녕 척경비]]〉에서부터 등장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