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징 (문단 편집) === 고환의 후계자가 되다 === 532년, 고환이 [[효무제(북위)|효무제]](孝武帝)를 북위의 제14대 황제로 옹립하자 고징은 11살이어서 비록 실질적인 권한은 없다고 해도 높은 지위로 올라갔다. 534년 고환과 효무제가 파워 게임을 했는데 효무제가 열세였기 때문에 [[시안(도시)|장안]]의 실력자인 [[우문태]]에게로 도망가버렸다. 고환은 돌아올 것을 요청했으나, 무시당하자 효무제의 사촌인 [[효정제]](孝靜帝)를 세웠고 [[북위]]는 둘로 나눠졌다. 즉, 장안을 중심으로 우문태가 효무제를 옹립하여 장악한 [[서위]]와 낙양을 중심으로 고환이 효정제를 옹립하여 장악한 [[동위]]로 나눠졌고, 곧 고환은 동위의 수도를 낙양에서 [[업]]성으로 옮겼다. 535년, 고징이 고환의 첩 정씨(鄭氏)[* 이름은 정대차(鄭大車)]와 [[간통]]하자 화가 난 고환은 고징을 폐위시키려 했지만 사마자여가 부인 누씨를 생각해 참으라고 했고 폐위는 없던 일이 되었다. 536년 15살이 된 고징은 고환의 군사적 본거지인 진양에 머물러 있었는데 고환에게 수도인 업성으로 가서 정부의 일을 맡아보겠다고 청했다. 고환은 처음에 거부했지만 손건(孫搴)의 건의를 받아들여 고징을 업성에 보냈다. 고징은 난폭하긴 했지만, 유능한 통치자였는데 법을 엄격히 적용하며, 고환보다 유연한 정책을 유지했다. 그리고 이때까지는 경력으로 승진이 이루어졌지만 이는 부패의 원인이 된다고 하여 능력있는 자들을 우선 승진시켰다. 540년 고징이 효정제의 누이인 빙익공주(馮翊公主)[* 이름은 원중화(元中華)로 훗날 정덕황후(靖德皇后)로 추존되었다.]와 결혼하자 효정제가 친히 고징의 집에 가서 축하를 해주었고, 모든 관료들이 축하선물을 주었다. 543년 고징과 그의 심복인 최섬(崔暹) 때문에 장수 고중밀(高仲密)이 반란을 일으켰다. 고중밀은 처음에 최섬의 누이와 결혼을 했지만 그녀를 버렸고, 그로 인해 고중밀과 최섬의 관계가 벌어졌다. 최섬은 고중밀의 잘못을 찾으려고 눈에 불을 켰는데 그러던 와중, 고중밀의 새로운 아내 이창의(李昌儀)가 너무 이뻤기 때문에 고징이 그녀를 [[겁탈]]하려고 했다. 이창의는 도망갔고 고중밀이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고중밀은 북예주(北豫州)자사를 맡게 되었는데 북예주의 주도 호뢰(虎牢)를 서위로 넘기면서 투항했다. 빡친 고환은 최섬을 죽이려고 했지만 후에는 용서하고 [[태형]]에 처했다. 고징도 진원달(陳元達)을 통해 최섬을 처벌하면 자신의 권한이 약해지기 때문에 그를 벌하지 말라고 청했고, 고환도 최섬을 벌하지 않았다. 호뢰와 낙양에서 동위와 서위의 군대가 맞붙었고, 우문태와 고환 모두 거의 죽을 뻔 했다. 이후에 동위가 호뢰를 함락했고, 이창의는 업성으로 보내져 고징의 첩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