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종(송) (문단 편집) == 평가 == 예술가, 서화가, 서예가로서는 독보적이고 창의적이었던 휘종의 아들답게 고종은 서화 감상에 능하였으며 특히 서예에 뛰어났다고 한다. 능력은 당연히 휘종 보다는 훨씬 나았었고 나라를 다시금 세웠지만 아버지 휘종이 간신 채경을 총애했듯 [[진회]]를 총애해 [[악비]]를 처형하는 등 진회의 20여 년 공포 정치를 방관해버렸다. 결론적으로는 나라를 다시금 세운 만큼 능력은 있었으나 그 능력이 후대까지 좋게 이어져 성장하기엔 좀 부족했다고 할 수 있다. 비슷한 예시로는 [[동진]]의 [[원제(동진)|사마예]], [[후연]]의 [[모용수]] 그리고 본인과 묘호가 같은 고려의 [[고종(고려)|고종]] 등이 있다. 송고종을 옹호하자면 [[악비]]나 [[한세충]] 같은 [[군벌]]은 황제의 만류에도 군벌들끼리 치고 받는 싸움이 자주 있었고, 사병을 갖고 있어 황제 입장에선 위협 요소였다. 이들의 군권을 회수할 필요성이 있었다. 또 남송 지역에 발생하던 [[반란]] 세력도 진압해야 하는 상황에서 북벌을 주장하는 악비의 뜻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측면도 있었다.[* 당시 중국 강남은 불과 1120년에 [[방랍]]의 난이 있었던 지역이고, 이때의 강경 진압으로 3백만 명 내외로 추정되는 희생자가 있었기 때문에 이 지역은 송 조정에 대한 반감이 심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휘종의 9남이었고 태자와 태손이 이미 있는 상황이라 아주 예외적인 상황이 아니라면 황제가 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인물이었는데, 대규모 혼란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즉위했다는 점도 고려의 여지가 있다. 휘종에 비해 다행인 것은 금나라의 대대적인 공습을 [[채석기 전투]] 등에서 막아냈고, 금에 칭신하며 조공을 바치는 등 굴욕적인 조약을 맺어 체면을 구기긴 했지만 금과 화친을 맺어 어찌됐든 남송을 지켜냈다는 점이다. 고종 입장에선 상기된 고려 사례를 봐도 알 수 있듯 금을 처단하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 같았겠지만 현실적으로 안 된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송 고종 사후 국력을 회복한 남송은 여러 차레 북벌을 시도하였으나 그때마다 대다수는 처참하게 패했다. 심지어 [[금나라]]가 [[몽골 제국]]에게 무너지는 와중에도 북벌했다가 역으로 박살났을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고종은 채석기 전투 이후 몇 개월 안 가 양자 [[효종(송)|송효종]]에게 양위하고 본인은 25년 동안 상황(上皇)으로서 유유자적했다. 이때 사치스로운 생활로 인한 비판도 있지만, 그래도 고종의 뒤를 이은 효종이 남송 시절 재위했던 역대 황제 중에선 가장 뛰어난 명군이라 남송은 내실을 정비할 수 있었다.[* 효종도 영토수복에 대한 의지가 있어 북벌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당시 금 역시 [[세종(금)|금 세종]]이 즉위하며 리즈 시절이었던터라 사실상 실패하고 만다.] 후계자 잘 둔 덕분에 다른 [[고종]] 시호를 받은 쪽보다는 사정이 나았다는 말도 있다.[* 물론 고종이라도 청 고종 [[건륭제]]처럼 뛰어난 인물도 있긴 했다. 건륭제가 말년으로 갈수록 [[청나라]]가 망하는 단초를 제공했다고 비판받기도 하지만, 어찌됐든 송 고종보다야 뛰어난 인물이었다.] [[조선]]의 [[선조(조선)|선조]]와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 초기에는 [[악비]]에게 집을 하사하고 정충이라는 시호를 내리며 아꼈고, 선조 역시 [[이순신]]을 대신들의 반대에도 7계급이나 파격 승진을 시키며 아꼈지만 고종은 악비가, 선조는 이순신이 공을 세우자 질투하는 쪼잔한 모습을 보인 거 역시 비슷하다. 게다가 선조, 고종 모두 왕위에 오르기 전에는 좋은 평가를 받았고 장수들이 군벌화 될까봐 걱정했던 것도 비슷하다. 송고종을 선조보다 부정적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송고종이 악비 뿐만 아니라 악비의 측근 가족까지 보복을 가했다는 것을 주 요인으로 들고 있다. 그에 비해 선조는 일선의 장수들과 의병장들은 경계했지만 최소한 목숨은 거두지 않고[* 예외는 [[이산겸]]과 [[김덕령]] 정도인데, 이산겸은 군사를 모아 놓고 왜군을 토벌하러 움직이지 않아 송유진의 난 전부터 의심을 받고 있었고 김덕령은 [[이몽학의 난]] 가담자 다수로부터 공통적으로 이름이 거론되어 같은 당파인 [[서인]]에서조차 극형을 주장했다.] 철저히 죄를 따져 처벌했다. 그리고 군벌로 변질될 수 있는 [[의병]]들을 중앙군의 편제에 넣으며 유연하게 통제했으며, 전쟁이 끝난 후 죽을 때까지 전후복구를 위해 힘썼다. 반대로 고종이 비록 정치적으로 악비를 숙청하면서 군벌 숙청의 희생양으로 삼았지만, 정강의 변 이후 대륙의 군벌세력들은 조선의 장군들과는 차원이 다른 권력을 쥐고 있었으며, 실제로 군벌 세력들은 [[항저우]]까지 포위하기도 하는 등 금나라보다 더욱 큰 위협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내부 안정을 중시한 고종이 왕실에 칼을 들이민 군벌들에 대한 경계심이 선조보다 컸으면 컸지 작을 수가 없었다. 한마디로 둘이 겪은 상황과 배경 자체가 확연히 다르다는 점을 배제한 채 겉으로만 드러나는 행적을 보고 판단할 수없다. 그리고 전후 처리에 있어서 고종도 노력을 안한 것은 아니다. 금나라군의 양쯔 강 도하를 막기 위해 해군력을 강화시켰음은 물론, 내부 안정을 다지는데 주력했음은 변함이 없다. 임진왜란 이후 해군력이 발전하지 못한 조선과 달리 남송의 해군은 남송-몽골 전쟁 초중반까지 동아시아 최강의 해군으로 군림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