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종(대한제국) (문단 편집) == 이름 == 이름이 4개이다. 아명 '명복(命福)'과 [[초명]] '재황(載晃)', [[휘]]인 '형(㷗)'과 '희(熙)'이다. '명복(命福)'은 임금이 되기 전에 썼던 어릴 적 이름으로, [[철종(조선)|철종]] [[사망|승하]] 이후 차기 임금으로 정해진 후에는 더 이상 사용하지 않았다. 더 어릴 때에는 '개똥'이란 이름으로 불렸는데 귀한 자식일수록[* 철종 즉위에 얽힌 비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조선왕조는 후기로 갈수록 점점 손이 귀해졌다.] 천한 이름으로 불러야 액운을 막아 오래 산다하여 아버지인 [[흥선대원군|흥선군 이하응]]에 의해 불린 이름이다.[* 《[[맹꽁이 서당]]》에도 '장쇠' '마당쇠' 같은 이름이 나오는 것도 같은 이유다.] '재황(載晃)'은 즉위하기 직전에 잠깐 '''익성군(翼成君)'''으로 봉해졌을 때 임시로 개명한 이름이다. [[철종(조선)|철종]]이 승하한 직후인 [[1864년]] [[1월 16일]]부터 즉위식을 거행한 같은 달 21일까지[* 음력 계해년(1863년, 철종 14년) 12월 8일 ~ 12월 13일.] 단 6일 동안만 사용했다.[*출처1 [[http://yoksa.aks.ac.kr/jsp/aa/ImageView.jsp?aa10up=&aa10no=kh2_je_a_vsu_24733_001&aa15no=&aa20no=&pageno=&imgnum=JE_A_24733_001_000032&imgsize=|《이태왕왕족보(李太王王族譜)》.]]] '명복'은 [[아명]]이었고 정식 이름이 아니었기에, 원래대로라면 15세 정도에 [[관례]]를 치르면서 본가의 항렬자에 맞춰 정식 이름을 지어야 했다. 그런데 고종이 12세에 왕위를 이으면서 [[효명세자|익종]]의 양자로 입적했기 때문에, 더 나이들어서 [[흥선대원군|흥선군]]의 아들로서 받아야 했던 이름을 정식 즉위 직전에 형식적으로 받은 것이다. 흥선군 일가에서 고종 세대의 항렬자는 '재(載)O' 자였고 여기에 맞춘 이름이 '재황'이다. [* 원래는 [[인평대군]] 8대손의 항렬자로, 원래 인평대군파 직계 출신인 고종 일가는 [[남연군]](고종의 할아버지)이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한 후에도 인평대군파의 항렬자를 사용했다. 그리고 [[1868년]](고종 5년)부터는 [[흥선대원군]]이 아예 인평대군 7대손 '응(應)' 자 부터 그 아래 항렬자 전부를 [[덕흥대원군]]의 모든 후손들이 통일/사용하게 했다.('응'자 항렬은 덕흥대원군 기준 11대손이고, 고종의 '재' 항렬은 12대손이다.) 고종 시기 기록을 보다가 '이재O'이란 왕족이 나오면 고종의 형제 또는 형제뻘 종친으로 생각하면 된다.] '형(㷗)'은 [[조선|조선국]] 국왕, [[대한제국]] 황제 및 태황제일 때 사용했던 정식 이름이다. 상술했듯, 고종은 [[효명세자|문조]]의 양자로 입적했기 때문에, 명목상 [[헌종(조선)|헌종]]의 동생이 되었고, 따라서 헌종의 휘 '환(烉)'의 '火' 발을 따라 '형(㷗)'으로 개명한 것이다. '㷗'의 독음은 '희', '형' 2개로 알려져 있으나 고종 이름의 발음은 '형'이 맞다. [[https://jsgimage.aks.ac.kr/view?qCond=bookId&q=K2-356_001&startIndex=5&pageIndex=1&pageUnit=20&sortField=&viewType=&id=20181019031925987|고종 때 지은 《열성어휘(列聖御諱)》에는 독음이 '형'으로 적혀있고, 대응하는 음의 한자로 '逈(멀 형)'을 써두었다.]] 조선 왕실에서 공식적으로 고종의 이름을 '형'으로 발음한다고 적은 이상, '희'보다는 '형'으로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 [[경술국치]] 이후 '희(熙)'로 개명하여 죽기 전까지 사용했다는 말도 있다. 그런데 고종이 정식으로 이름을 '희'로 바꾼적은 없으며 1931년과 1940년에 [[이왕직]]에서 편찬한 [[http://yoksa.aks.ac.kr/jsp/aa/ImageView.jsp?aa10up=&aa10no=kh2_je_a_vsu_24733_001&aa15no=&aa20no=&pageno=&imgnum=JE_A_24733_001_000031&imgsize=|《이태왕왕족보(李太王王族譜)》]] 및 [[http://yoksa.aks.ac.kr/jsp/aa/ImageView.jsp?aa10up=kh2_je_a_vsu_24732_000&aa10no=kh2_je_a_vsu_24732_001&aa15no=&aa20no=&pageno=&imgnum=JE_A_24732_001_000021&imgsize=|《왕공족보(王公族譜)》]]에 고종의 이름이 '㷗'으로 적힌 것을 보아 이는 사실이 아니다. 다만 '희(熙)'로 쓴 용례는 많이 보인다. 이것은 '㷗' 자 자체가 잘 안 쓰는 글자이기 때문에 대체자인 '熙'로 쓴 경우가 많아서일 뿐이다.[* 고종의 친형인 [[흥친왕]]의 이름과 발음이 같다.] 이런 벽자를 쓴 이유는 피휘 관습도 있거니와, 항렬 규칙 때문이다. [[사도세자|장조]]의 현손(4대손) 항렬 대에서는 이름에 '어진사람 인(儿)'이 들어간 글자를 공유한다. [[정조(조선)|정조]]의 증손인 [[헌종(조선)|헌종]]은 '환('''烉''')'으로 안에 포함되어있다. 그리고 고종은 '형('''㷗''')'으로 좌우로 밖에 나뉘어 있으며, 초명 '재황(載'''晃''')'에는 '황(晃)'의 밑에 발의 형태로 들어가있다. [[은언군]]의 증손인 [[덕안군]]은 '재덕(載'''悳''')', [[청안군]]은 '재순(載'''純''')'으로 파자하지 않으면 잘 알아보기 어려운 형태이다. [[은신군]]과 [[은전군]]의 증손으로 [[완림군]]은 '재원(載'''元''')', [[완순군]]은 '재완(載'''完''')', [[완영군]]은 '재긍(載'''兢''')', [[흥친왕]]은 '재면(載'''冕''')', [[완은군]]은 '재선(載'''先''')', [[인양군]]은 '재근(載'''覲''')', [[의양군]]은 '재각(載'''覺''')', [[예양정]]은 '재규(載'''規''')'로, 고종의 초명과 마찬가지로 발의 형태로 온전히 들어가있다. [[완평군]]의 둘째 아들 '재현(載'''現''')'은 본가의 양자로 들어가 황실 [[종친]] 자격을 잃었지만 이름자에 '儿'은 그대로 있다. 유일하게 [[경은군]] '재성(載星)'이 규칙을 적용받지 않았는데, [[서자]]인데다 작호를 받은 게 굉장히 늦은 시기여서 그런 듯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