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종(당) (문단 편집) ===== 숙적인 [[고구려]]를 멸망시키다. ===== 동맹국인 [[백제]]가 660년에 멸망하자 고구려는 [[신라]], [[당나라]], 양쪽에서 압박을 받으며 고립 상태가 되었다. 태종이 고구려를 공격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지만 이는 태종 당대는 백제가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기도 하고, 당시 준비 중이던 대규모 고구려 원정에 대한 중지 정도로 보는 편이 타당하다. 애초에 고종은 자신의 아버지인 태종이 고구려군에 패퇴했고 이후로도 꾸준히 전쟁을 벌이다가 붕어했기 때문에 고구려 정벌을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자신의 숙원 사업으로 여겼을 가능성이 크다. 655년에 고구려와 백제, [[말갈]]이 연합해 신라를 공격하여 33개 성을 빼앗자 신라의 [[태종 무열왕|김춘추]]가 구원병을 요청했고, 이에 고구려의 뒤통수를 치기 위해 선제공격을 했지만 패퇴했다. 659년에도 재차 공격했지만 성과없이 퇴각했다. 그러다가 660년 백제를 멸망시키는 데 성공하자 고구려를 고립시켰다고 판단하고, 이를 곧 정벌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한 고종은 661년 정월에 대규모 원정대를 편성했다. 4월, 결국 고종은 군대를 내보낸다. 이에 대해서 《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의 기록이 약간씩 다르다. 대략 계필하력을 요동도행군대총관, 소정방을 평양도행군대총관, 임아상을 패강도행군대총관, 소사업을 부여도행군대총관, 정명진을 누방도행군총관, 방효태를 옥저도행군총관[* 정명진과 방효태는 기록에 따라 총관, 대총관이 각각 다르게 기술되었다.]으로 삼아 총 35개 군에 달하는 대병력을 이끌고 고구려를 치도록 했다. [* 1개 군 = 최소 5,000명이라는 《당육전》의 기록을 기준으로 기미주의 병력이 추가되어 200,000명을 조금 상회하는 수준의 병력으로 보기도 하지만 앞서 편성된 백제원정군 휘하 14군, 총 130,000명의 편제를 생각해본다면 30~40만명 내외로 보는 것이 합리적으로 보인다.] 가장 먼저 고구려 영내에 진입한 것은 [[소정방]]이 이끄는 평양도행군이었다. 661년 8월, 소정방은 바다를 통해 패수로 진입하여, 이를 저지하는 고구려군을 격파하고 [[평양]] 근처인 마읍산을 점령하여 군영을 세운 후 평양을 포위했다. 그러나 [[평양성]]의 함락이 쉽지 않았고, 전쟁은 장기전이 되었다. 그러는 사이 서북 지역에서 튀르크계 [[철륵]](퇼레스)이 봉기하면서 [[글필하력]][* 글필하력은 [[랴오허|압록수]]에서 그곳을 지키던 연남생의 고구려 군대를 대패시켰으나 고종의 조서를 받고 철군했다. 여기서 [[연남생]]의 고구려군을 대패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조서를 받고 철군했다는 것이 말이 안 되는데, 철륵의 봉기도 주 요인이었지만 글필하력의 요동도행군의 정황을 보면 글필하력이 연남생의 군대를 대패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도우러 온 요동 지방의 고구려군에게 공격을 받았거나, 연남생의 군대와 싸우다가 전쟁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거나, 연남생의 군대와 요동 지역의 고구려군의 협공으로 인해 대패하고 철군했을 것이다.]과 [[소사업]]군은 철수해야만 했고, [[임아상]][* [[사수 전투]]에서 연개소문이 이끄는 고구려군에 의해 패사했다.], [[정명진]][* 신성을 공략했으나 실패했고, 글필하력과 소사업의 군대가 철군할 때 정명진의 누방도행군은 이를 틈탄 고구려군의 반격을 받아 정명진은 부장 양사선과 함께 난전 중 전사했다.], [[방효태]][* 사수 전투에서 연개소문이 이끄는 고구려군에 의해 방효태와 그의 13명의 아들을 포함한 전군이 몰살당했다.] 등의 사령관들이 줄줄이 패배해 죽어나갔으며 소정방도 김유신의 구원에 의해 겨우 살아 돌아갔다. 이후 당고종은 철륵의 봉기를 진압하고, [[토번]]의 도전에 대처하는 등 바쁜 시기를 보내게 되었다. [[연개소문]]에게 연이어 대패한 이후 [[고구려]]와의 전쟁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고 발을 빼려는 수순에 들어서려던 당고종은 때마침 [[연개소문]] 사후 그 세 아들들간의 정권 투쟁의 결과로 맏아들 [[연남생]]이 [[국내성]] 일대를 거느리고 투항(666년)하자 재차 공격에 들어갔다. 여기에 [[신라]] 또한 연씨의 분열로 [[연정토]]가 바치는 영토를 얻었고 남쪽에서 협공에 들어갔다. 당군은 667년 1월, 고구려의 요동 방어선 북쪽의 요충지인 신성을 비롯, 그 휘하의 16개성을 함락시키고 국내성에 웅거한 연남생과의 연결선을 확보했으며, 668년 2월에는 부여성과 휘하 40여개의 성을 함락시켜 후방을 안정화시켰다. 그리고 그해 8월 [[평양성]]을 포위한 후, 신라와의 협공으로 9월 21일 마침내 평양성을 함락시키고 [[보장왕]]으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이로써 고구려는 건국 705년 만에 멸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