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종(당) (문단 편집) ===== [[백제]]를 멸망시키다 ===== 처음에는 부황의 '''정관의 치'''를 이끌었던 유능한 신하들을 옆에 두고 대외적으로 공격적인 입장을 취했다. 특히 [[백제]]에 대해서는 강경한 입장이었는데, 이는 645년 제1차 고구려-당 전쟁 당시 보인 백제의 태도 때문이었다. 본래 백제는 [[당나라]] 건국 직후부터 대당 외교에 대단히 공을 들였으며, 이것이 [[고구려]]를 견제하려던 당나라의 의도와 맞아떨어져 매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전 작업 아래 백제가 [[고구려]]와 함께 대대적으로 [[신라]]의 [[한강]] 유역을 공략하기 시작한 것이 당-백제 간 외교관계 파탄의 시작이었다.(643) 이후 당태종의 경고에 따라 [[의자왕]]은 스스로 군사를 물려야만 했다. 그리고 645년 당의 대군이 고구려를 공격할 당시, 백제와 신라 양쪽 모두에 고구려 공격을 지원할 것을 요청했는데 여기서 신라는 당태종의 요청에 응해 원군 30,000명을 보냈지만, 함께 고구려를 치기로 했던 백제는 원군을 보내지 않고 오히려 신라를 공격하여 644년 [[김유신]]에게 빼앗긴 7개 성을 되찾았다. 즉 백제가 당을 돕는 신라를 공격→고구려 정복에도 간접적으로 걸림돌이 된 셈이므로 태종이 백제에 분노해, 이 사건 이후 백제는 태종이 죽을 때까지 사신을 보내지 못했으며, 고종이 즉위한 후인 650년이 되어서야 관계 정상화를 시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 당나라는 [[김춘추]]의 언변에 화답해 외교 파트너를 백제에서 신라로 완전히 교체해 버린 후였다. 이를 증명하듯, 651년에 [[백제]]에서 사신을 보내자 고종은 백제에게 [[신라]]와 화친할 것을 요구했다. 그 화친의 조건은 '신라에게서 뺏은 땅([[대야성]])과 포로들을 모두 돌려줘야 하며, 이를 어길 시 백제를 정벌하겠다'는 것이었고, 의자왕은 당과의 회복 노선에 최선을 다하는 듯 하면서, 고구려를 도와 [[말갈]]과 함께 655년 정월, 신라를 대대적으로 침공하여, 신라의 한강 지역 33개의 성을 함락시키는 이중적인 행동을 취했다. 이로써 다시 한번 백제는 [[당나라]]와의 외교 노선에서 완벽하게 배제되어버렸다. 거기에 [[백제]] 내부에서 내홍이 발생했는데, 642년 [[의자왕]]이 백제의 귀족들을 대거 쳐내며, 자신의 아들들에게 고위직을 물려주는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 결국 여기에 불만을 가진 백제의 귀족 세력들이 대거 [[신라]]에게 붙는 상황이 되었다. 655년 10월 [[김유신]]이 좌평 임자와 내통하여 도비천성을 함락시켰다. 또한 당고종 역시 신라와 함께 협공할 것을 계산하며,[* 이쯤 되었을 때는 당이 [[신라]]에 진법이나 무기 등을 전수하여, 신라의 국력이 [[백제]]보다 강했다는 것이 학계의 이야기다. 그럼에도 650년대 신라가 백제의 공세에 수세로 일관한 것은 1대1의 국력 차이보다는 북쪽의 고구려, 서남쪽의 백제, 동남쪽의 일본에 둘러쌓여있는 지정학적인 조건 탓이 컸다.] 백제에게는 관계 정상화를 두고 계속해서 거짓정보를 흘렸는데, 이 상황에서도 판단을 잘못하며, 자아도취한 [[의자왕]]은 결국 성충의 충언을 무시하고 그를 아사시키는 병크를 터트렸다. 고종은 마침내 660년 3월 [[소정방]]을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임명하여 대군을 편성, 백제를 멸망시키도록 지시하고 신라 또한 [[김유신#s-1]]과 50,000명의 군사를 보내 동서로 협공하도록 했다. [[소정방]]이 군대를 이끌고 오는 것을 의자왕이 파악할 때쯤, [[한강]] 유역과 [[대야성]]에 주둔하고 있었던 백제의 주력군을 소집하고, 왜국에 파병을 요청하기 위해서, [[계백]]에게 군사 5,000명을 주어 지연전을 펼치도록 했지만, [[황산벌 전투]]에서 전멸했고 자신은 [[웅진성]]으로 달아났으나, [[예식진]]의 배반으로 결국 660년 7월 18일, 항복을 선언했다. 당군은 의자왕을 포함해 부여씨 왕족 및 귀족 93명, 그리고 일반 백성 12,000여 명을 [[당나라]]로 끌고 갔다. 이후 백제는 지방군을 중심으로 한 부흥운동이 시작되어 약 3년간 항쟁했으나 부흥군과 파병된 [[왜군]]의 연합군이 663년 [[백강 전투]]에서 나당연합군에게 몰살당하며, 백제의 잔여 세력까지 완전히 몰락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