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종(당) (문단 편집) ==== 황후 왕씨 폐위와 [[측천무후|새 황후]] 책봉 ==== 고종은 기존의 황태자비였던 왕씨를 황후로 올렸으나 곧 관계가 소원해지고 [[숙비 소씨]]를 총애하게 되었다. 이에 황후 왕씨가 자식이 없다는 이유로 폐위하려 했으나 내로라하는 명문 집안이었던[* 서위의 대장 왕사성의 현손이자, 당태종의 고모인 동안공주(同安公主)의 손녀였다.] 황후 왕씨를 장손무기와 저수량을 비롯한 좌명대신들이 옹호하여 분쟁이 심각해졌다. 이에 불만을 품은 고종은 감업사에 자주 들러 관례대로 출가하여 [[비구니]]가 된 무미랑(훗날의 [[측천무후]])를 총애하게 되었고, 652년 결국 무미랑에게서 아들 [[이홍(당)|이홍]]을 얻었다.[* 문제는 측천무후가 [[태종(당)|태종]]의 [[후궁]]이었으므로 고종에게는 의붓어머니 뻘이 된다는 것이지만, [[당나라]]가 [[한족]] 국가일지라도 황실은 북방 유목민 혼혈이라 [[형사취수제]] 개념으로 봐야 한다.] 다음 해인 653년 황후 왕씨와 숙비 소씨 간 대립이 극한으로 치닫게 되었다. 황후 왕씨는 고종의 숙비 소씨 총애를 막기 위해 감업사의 무미랑을 다시 황궁에 들여 정2품 소의(昭儀)에 책봉하도록 했다. 처음에는 황후 왕씨의 생각대로 고종의 총애가 숙비 소씨에게서 멀어졌지만, 소의 무씨가 고종을 독점하게 되면서 상황은 급변하게 되어 황후는 소의 무씨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소의 무씨는 황후와 숙비 소씨에게서 배척을 받는 후궁들과 빈천한 가문 출신 서족들, 장손무기 및 저수량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이세적|이적]]까지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 세력을 구축했다. 결국 치열한 정치 투쟁 끝에 소의 무씨의 딸 [[안정공주]]가 사망하는 사건[* [[측천무후]]가 [[안정공주]]를 낳았는데, 이 아이는 생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망했다. 이를 측천무후와 연결된 파벌은 황후 왕씨가 다녀가서 죽인 것으로 몰아갔으며 이것이 승리의 결정적 배경이 되었다. [[측천무후]]가 정쟁에서 이기기 위해 안정공주를 베개로 눌러서 죽였다는 야사가 있다.]이 벌어지면서 공신들의 수장격이던 저수량과 장손무기가 물러나고 황후 왕씨와 숙비 소씨가 폐서인되어 자결함으로써 무씨가 황후로 책봉되었다. 직후 무후는 황태자(皇太子)였던 [[이충(당나라)|이충]](李忠, 643~664)을 폐위시키고, 자신의 맏이인 이홍을 황태자 자리에 올렸다. 이러한 황후 폐위와 책봉 과정은 전통적으로 정권을 잡고 있었던 [[관롱집단]](사족)[* 북주, 수, 당을 건국한 핵심 그룹은 '''무천진(武川鎭) 군벌'''이라고 불린다. 무천진은 북위 말기 [[육진의 난]]이 벌어질 때 6진 중 하나인데, [[북주]]의 실질적인 건국자였던 우문태를 따라 이 지역 [[선비족]]들이 관중으로 이동하여 [[서위]] 군부의 핵심 집단이 되었다. 우문태의 일족인 우문씨, 수문제 양견의 일족인 홍농 양씨, 그 아내인 문헌황후 독고씨의 일족인 독고씨, [[수당교체기]]때 최대 세력이었던 이밀의 이씨, 당고조 이연의 일족인 농서 이씨, 당태종 이세민의 황후인 문덕황후 장손씨의 일족인 장손씨가 모조리 이 집단에 속했다. 이들은 8개의 주국대장군, 12개의 대장군직을 대대로 세습하는 막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고 이전의 산동, 관중 일대의 전통적인 한족 [[문벌귀족(중국)|문벌귀족]]과는 대비되는 '신귀족' 집단을 형성해 황실도 이 집단의 주도권을 잡기 힘들 정도였다.]과 이들에게 차별 대우를 받았던 서족 세력 간 정치 투쟁으로 보는 것이 다수설이며 측천무후의 승리는 관롱집단의 정치적 패배와 몰락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이런 장면들을 주도한 인물은 측천무후가 아니라 고종 자신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측천무후에게는 어느 정도 용인이 되었지만 선제 태종의 측실로 이미 출가했다가 환궁했다는 약점도 존재했고 '''고작해야 당대에 출세한 개국공신이 전부'''라 격이 낮은 가문이라는 한계가 존재했다.[* 이 시대에 '가문 좀 대단하네.' 하려면 못해도 후한 말부터 거진 수백 년 이상 고위직을 역임해야 했다. 이게 얼마나 심했는지 후대의 [[문종(당)|당 문종]]이 '''"우리 가문이 200년간 황제를 했는데도 최고 가문이 아니다."라고 한탄'''할 정도였다. 이러니 고작 개국공신 정도로는 단순한 벼락 출세 대접을 받았던 것이다.] 때문에 [[측천무후]]는 고종의 총애를 제외한 지지 기반이 전혀 없었으므로 황실 내에서 자기 기반 다지기에도 급급했다. 《이위공문대》를 보면 태종 본인도 특히 장손무기를 상당히 부담스럽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