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종(고려) (문단 편집) == 생애 == 1192년 1월 18일 아버지 [[강종(고려)|강종]]이 [[태자]]이던 시절에 태어났다. 5세 때인 1197년 할아버지 [[명종(고려)|명종]]이 [[최충헌]]에 의해 폐위되면서 아버지와 어머니 [[원덕태후]]는 모두 [[강화도]]로 [[유배]]되었으며 어린 고종은 어떻게 됐는지 《[[고려사]]》에 나오지 않아 알 수 없다. '''수창궁 사변''' 이후, 1212년 아버지가 최충헌에 의해 [[국왕]]으로 옹립되면서 [[황해도|서해도]] 풍주 안악군에서 다시 [[개성시|개경]]에 돌아왔으며, 이후 만 20세의 나이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고령의 아버지 강종이 재위 1년 8개월만에 붕어하면서 1214년 천위(天位)에 올랐다.[* ''' 수창궁 사변'''으로 제21대 [[희종(고려)|희종]]이 폐위되고, 고종의 부왕인 제22대 강종이 올려지는 과정에서 고종을 [[왕위]]에 올리는 조건으로 강종과 최충헌 사이에 밀담이 오갔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1215년 아버지 강종을 태묘에 모시면서 선조들[* 1대 태조, 2대 혜종, 8대 현종, 13대 선종, 15대 숙종, 16대 예종, 17대 인종, 20대 신종, 22대 강종. 당시 고려 [[종묘]]가 '''천자식 9실 7묘제'''였기 때문에 9명에게 올렸고, 사실상 당시 대표적인 [[군주]] 전원에게 올린 것이었다.]에게 시호를 더하고, 위봉루에서 사면령을 내리며 국정 운영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규보]]는 고종에게 <성황조향태묘송>(聖皇朝享太廟頌)을 지어 올리며, 고종을 '성황'(聖皇), '제'(帝)라고 찬양했다.[* 《[[동국이상국집]]》 19권 기록.] 고종은 왕실 [[제사]]를 크게 치루며 제18대 의종 이후 추락할대로 추락한 국왕의 권위를 회복하려 한 듯하지만 힘이 없어 최충헌의 눈치를 보는 신세였다. 특히 최충헌은 고종이 움직일 때 왕의 허가도 없이 '''어가에 같이 타는 무례함을 보이며''', 고종을 우습게 봤고 최충헌의 [[중방]]이 조정을 마음대로 다루며 '''[[왕실]]의 건물을 부수는 등 만행은 여전했다'''. 고종 3년, 몽골 태조 칭기즈 칸 11년인 [[1216년]]부터 [[거란 유민들의 고려 침공]]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전란을 통해 당시 세계 제국을 건설하고 있었던 [[몽골 제국]]과 고려가 처음으로 접촉하게 되었다. 자세한 것은 [[여몽전쟁]] 문서와 [[여몽전쟁/무신정권 비판]] 문서 참조. 1216년 [[금나라]]에 [[반란]]이 일어나고, [[가뭄]]이 드는 등 [[나라]] 꼴이 [[막장]]이 되자 금나라가 구원 요청을 하기 위해 사신들을 보내지만 모두 무시하고 차단했다. 하지만 금나라 사람들이 곡식을 사기 위해 온갖 재화를 들고 고려 국경에 와서 당시 밀무역이 흥했다고 한다. 8월에 금나라에서 반란을 일으킨 [[거란]]족들이 고려에도 선전포고를 해오자 군대 인사를 재조정했고, 9월부터 작은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 때 "달단군"(몽골군)이 금나라와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다는 정보가 입수된다. [[거란 유민들의 고려 침공]] 참고. 1217년 거란군이 대대적으로 침공해와 황주[* 현 [[황해북도]] [[황주시]]. 고려 초 [[황보제공]], [[신정왕후 황보씨]], [[천추태후]], [[헌정왕후]], [[황주량]] 등을 배출한 [[고구려]]계 황주 [[호족(한국사)|호족]]의 본거지이다.]가 속절없이 공격당했다. 1218년 금나라 반란군[* [[포선만노]]의 [[동하]].]에 [[후요]]까지 침공하며 북방이 개판이 되었다. '''12월에 몽골군이 포선만노와 힘을 합쳐 거란을 진압한다는 이유로 고려 북방에 들어왔다.''' 1219년 1월 [[몽골]]과 고려의 정식 접촉이 성사됐지만 몽골의 [[장군]]들은 무례하고 고려의 예법을 몰라[* 당시 몽골은 그 어떤 나라도 막지 못하는 최강의 나라였으니 무례한건 당연했고, 고려와는 단절되어 있었으니 고려의 예법을 몰랐다.] 자신들의 털옷과 활을 찬 채로 고종에게 다가가 손을 잡으려 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로 고종의 안색이 변하고 좌우가 당황했을 때 한 [[신하]]가 >"감히 추한 오랑캐(醜虜)가 지존(至尊)에게 다가갈려 하다니!"[* 《고려사》원문에 실제로 이렇게 기록됐다.] 라고 외치며 나가라고 하자 결국 몽골 장군들은 고려 예법대로 고려식 의복을 입고 읍을 했다.[* 원래 고종에게 절을 해야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1219년 9월 20일 제5대 무신정권 집권자이자 초대 최씨 집권자였던 최충헌이 죽고, [[최우]]가 집권자가 되었다. 1221년 9월 몽골 사신이 또 와서 늘 했던대로 오만하게 굴자 고종은 몽골 사신을 내쫓고 사신을 더이상 받지 않으려 했지만 신하들이 반대해 화를 냈다고 한다. 고종은 고려 국왕이 아무리 왕권이 추락했다고 해도 고려 안에서는 [[천자]](天子)로서 군림했으니 몽골의 무례를 참기 힘들었을 것이다. 1223년 '황태후'(皇太后)를 '태황태후'(太皇太后)로 올리고 사면령을 내렸는데 태황태후는 당시 사망한 희종의 모후 [[선정태후]]와 생존해 있던 고종의 모후 [[원덕태후]] 2명 중 1명으로 보인다. 1224년 1월 신하들이 최우의 집에서 논의하여[* 여전히 왕권이 회복되지 못한 상태임을 보여준다.] 몽골 사신에게 예물을 쥐어주고 화친의 뜻을 담아 돌려보냈다. 근데 이 놈들은 이상하게 [[비단]] 등을 국경에서 버리고, 자기들이 요구했었던 수달 [[가죽]]만 들고 갔다. 1225년 1월 몽골로 돌아가던 길에 '''[[저고여 피살 사건|몽골 사신들이 강도에게 살해되었다]]'''.[* 한국 역사상 최대의 미스터리 중 하나로 누가 죽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고려는 진상 확인을 한 뒤 [[강도]]에게 죽었다고 전했으나 몽골은 이를 믿지 않고 결국 단교했는데 이 사건이 나중에 길고 긴 [[여몽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때 고종은 최우에게 강제로 강화도로 끌려가 [[섬]]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계속 강화도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다. 고종은 강도(江都) [[고려궁지]]에 살면서 온갖 '도량'을 벌였는데 '도량'은 [[불교]] 기도식으로, 역대 고려 국왕들이 자주 행했지만 고종만큼 자주 한 국왕이 없었다. 천병신중(天兵神衆) 도량, 공덕천(功德天) 도량, 화엄신중(華嚴神衆) 도량, 인왕(仁王) 도량, 제석천(帝釋天) 도량[* 일반적으로 [[제석원]]에서 이루어졌다.] 등이었다. 보통 도량은 승려가 기도문을 읽는데 몇몇 도량은 고종이 직접 [[기도(종교)|기도]]를 했다고 한다. 아마 국난을 기도로라도 풀길 바랬을 것이고, 실권은 최우가 쥐고 있었으므로 할 수 있는 것이 이 것밖에 없기도 했다. [[불공]]을 드린다는 명목으로 감시 투성이인 [[궁]]을 잠시라도 나가 있을 수 있다는 점도 한 몫했을 것이다. 1249년 11월 제6대 무신정권 집권자이자 제2대 최씨 집권자였던 최우가 죽고, 천출이었던 [[최항]]이 집권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때도 고종은 권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1254년 7월 강화도를 잠시 나와 승천부(昇天府)[* 원래 정주(貞州)로 개경 개성부의 경기(京畿)(부속 도시)였다. 제16대 [[예종(고려)|예종]]이 자신의 어머니인 [[명의태후]]의 [[고향]]이라는 이유로 '승천부'로 떼어냈다.]에 있는 궁궐[* '승천궐'(昇天闕)이라 한다. 승천부에 있는 궁궐이라 승천궐이었다.]로 가 몽골의 사신들에게 자신이 강도에서 나오겠다고 언급했다. 1257년 4월 제7대 무신정권 집권자이자 제3대 최씨 집권자였던 최항이 죽고, 역시 천출이었던 젊은 [[최의]]가 집권자가 되었다. 제8대 무신정권 집권자였던 최의는 선대 최항의 측근들과의 갈등 끝에 1년 정도 밖에 정권을 유지하지 못하고, 1258년 3월에 그 일족과 함께 주살되었으며('''무오정변'''), [[김준(고려)|김준]]이 제9대 무신정권 집권자가 되었다. 1258년 5월과 8월에 다시 [[바다]]를 건너 승천부의 궁궐로 가 몽골 사신들을 접견했으며, 강화 협정에 따라 [[원종(고려)|태자 왕전]]이 [[원나라]]에 입조하러 간 사이 몸이 좋지 않아서 신하 [[유경]]의 집에 머무르고 있다가 결국 1259년 6월 30일에 붕어했다. 그의 유조(遺詔)는: >"내(余) 덕은 박한데 부담은 중하니, 병이 날로 심해진다. 생각컨데 왕위(王位)는 오래 비워 놓을 수 없다. > >내(予) [[원종(고려)|원자(元子)]]는 덕이 위까지 알려질 정도니 자리를 이어받도록 명한다. > >너희 관료와 부서는 사왕(嗣王)의 령을 듣도록 하되 사왕(嗣王)이 떠나있을 기간 동안은 군국(軍國)의 임무는 [[충렬왕|태손(太孫)]]이 처리하라. > >산릉의 제도는 검소하게 하고 제사는 삼일안에 끝내도록 하라." >---- > - 《고려사》 <고종 세가> 중. 임금의 마지막 조령(詔令)이다. 당시 무신 집권자였던 [[김준(고려)|김준]]이 고종의 둘째 아들인 [[안경공]] 왕창을 왕위에 올리려고 했으나 여러 신하들이 거부한데다 고종이 죽기 직전 남긴 유조(遺詔)에 의해 [[충렬왕|태손 왕심]]이 임시로 나랏일을 맡게 되었고, 태자 왕전은 이듬해인 1260년 귀국해서 정식으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 50년 뒤인 1310년 7월 을미일, 과거 [[중국]] 한나라 [[제후]]의 시호는 한나라 [[황제]]가 하사했다는 전례에 따라 원나라가 관작 및 시호를 추증하니 >'돈신명의보절정량제미익순공신(敦信明義保節貞亮濟美翊順功臣) - 태사(太師) -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 상서우승상(尙書右丞相) - 상주국(上柱國) - 고려국 충헌왕(高麗國 忠憲王)' 에 봉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