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조선 (문단 편집) === 신화 === 건국 신화로는 <[[단군]] 신화>가 존재하나, 그것이 고조선 시대부터 전하던 것인지 아니면 고조선 이후 어느 시점에 만들어져 《[[삼국유사]]》 등에 기록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삼국유사》에서는 《고기》(古記) 및 《위서》(魏書)라는 출처를 명시했으나, 《고기》의 정체는 불분명하고 《위서》 또한 어느 위나라의 문서인지 알 수 없다. 심지어 《위서》의 '위'가 '위'(魏)로 적힌 것과 《삼국유사》에서 '위만'이 '魏滿'[* 반면 《위략》에서는 衛滿 ]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당대에 위만조선에 대한 역사 의식을 표방한 독립적인 사서가 존재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잠부론》 등에서도 '魏滿'이라고 했으므로 근거는 빈약한 편이다. 한편 서사시인《동명왕편》을 지으며 [[이규보]]는 《[[위서]]》와 《[[통전]]》의 기록을 읽어보았으나 [[중국]]의 기록이라 그런지 기록이 자세하지 못하다고 했는데, 이 《위서》가 일연이 읽은 것과 같은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더욱이 현재 <단군 신화>가 기록된 문헌들도 《[[삼국유사]]》와 《[[제왕운기]]》, 《묘향산지》 등의 기록이 조금씩 다르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단군신화]]>가 [[고려시대]] 때 《삼국유사》를 쓴 [[일연]]으로 인하여 창작되었다고 주장했지만 현대에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단군신화>가 정확히 언제 성립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 [[고구려]]에서도 벽화에 [[곰]]과 [[호랑이]]로 추정되는 동물을 그려놓는 등 고조선과 관련한 무언가를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흔적이 있기 때문이다. [[고구려/문화#s-8|고구려/종교]] 항목 참고. 이와 별개로 고조선이 연나라와의 전쟁 이후 밀려났던 대동강과 평안북도, 그리고 그 부근에 <단군신화>가 널리 퍼져 있는 점, 그리고 <단군신화>에 나오는 풍백, 우사, 환웅의 상징성을 고려했을 때, 연나라와의 전쟁 이후 중심지를 평양으로 이동한 고조선의 지배층들이 개판이 된 나라를 다시 안정시키기 위해 <주몽 신화>처럼 ‘내가 너네한테 이런거 알려줘서 문명을 부여했으니 우리 따라’ 식의 메세지를 담아 신화를 창조했다 보기도 한다. <주몽 신화>의 경우, 부여의 <동명왕 신화>를 따라한 거긴 하지만 어쨋든 천손의 후손이 남쪽으로 내려와 부족국가로 갈라져 있었던 원[[고구려]] 사회를 통합해 강대국으로 성장시켰다는 메시지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또한 평안남도의 점제현 신사비가 고조선 계통의 신앙 구조를 반영한 것이라면, 산신(山神)에 대한 숭배가 존재했을 수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천왕]]- 21년 조에는 >'평양은 본래 선인(仙人) 왕검(王儉)이 살던 곳이다(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 라고 했는데 고조선이 [[신선]] 사상과 관련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