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정운 (문단 편집) === 국가대표 경력 === 대표팀에서의 전성기는 길지 않았지만, 대학교 재학기간 내내 단련한 런닝 크로스는 대표팀 역대 측면자원을 통틀어서 최고의 정확도를 자랑했다. 대표팀 후배 중에선 [[설기현]] 정도를 제외하면 비견될만한 선수가 없다. 1989년 5월 23일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 예선 [[싱가포르]]전에서 A매치에 데뷔하였다. 하지만 이탈리아 월드컵 본선 엔트리에는 포함되지 못했고, 대신 [[1990 베이징 아시안 게임]]에서 A매치 데뷔골을 기록하고 4강 진출에 기여했다. [[1994 FIFA 월드컵 미국]] 본선 엔트리에 포함되어 10번을 달고 조별리그 전경기에 풀 타임 출전하였다. 미국 월드컵 당시 기존의 장점이었던 전진 돌파력에 전술적인 움직임까지 크게 향상된 모습으로 [[스페인]]전에서 상대팀의 핵심 수비수였던 [[미겔 앙헬 나달]][* 테니스선수 [[라파엘 나달]]의 삼촌이다.]을 퇴장시키기도 하는 등 예선 3경기에서 전부 눈에 띄는 활약을 보였으며, 2골을 넣은 홍명보와 함께 해외진출이 가장 유력한 선수로 꼽히기도 했다.[* 당시 [[레버쿠젠]]에서 눈독을 들였다는 소문의 진위가 20년 넘게 확인되지 않고 있었는데.. 2018년말 엠스플과의 인터뷰에서 고정운 본인이 월드컵 직후 실제로 레버쿠젠에서 오퍼가 왔고 개인합의까지 완료했었음을 확인해 주었다. [[https://sports.v.daum.net/v/20181219075507688|기사]]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당시에는 에이전트가 존재하지 않아서 차범근을 통해 오퍼가 왔으며 이후 독일로 가서 협상을 벌였고 이적료 5억, 연봉 2억 5,000만원에 합의를 마쳤다고 한다. 하지만 구단에서 보내주지 않았다고 한다. 너무 헐값이 아니냐고 할지도 모르나 레버쿠젠의 오퍼가 있었던 1994년 당시 한국 프로축구 최고 연봉은 김주성의 8,400만 원이었다. 참고로 프로야구는 선동열의 1억 3,000만 원이 최고연봉이었으며, 한국 프로축구 최초의 억대연봉자는 1995년 홍명보와 고정운이 각각 1억과 1억 500만 원을 받으며 탄생했다. 어쨌든 단순비교는 힘들지만 현재 K리그 최고연봉이 15억 정도 하는 것으로 볼 때 마냥 적은 금액은 아니었던 셈이었다. 더군다나 그때는 한국축구나 K리그의 위상이 지금보다 현저히 낮았음을 감안해야 한다.] 특히 3차전 독일과의 경기에서는 독일의 우측을 초토화시키다시피 했는데, 골에 가까운 슈팅 두차례 포함해 [* 그중 하나는 당시 독일 GK 보도 일그너가 그야말로 가까스로 쳐냈다.] 끊임없는 돌파, 크로스를 작렬시키며 엄청난 존재감을 과시한다. 이후 활약을 이어가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과 [[1996년 AFC 아시안컵]]에서도 주전으로 활약하였다. 이후 나이가 들며 조금씩 하향세를 탔고,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최종 엔트리에서는 제외되었다. 사실 차범근호의 기본적인 골격은 고정운과 [[서정원]]을 양 날개로 두고 백업으로 이상윤과 [[김대의]]를 사정에 따라 교대로 기용하는 것이었는데, 2차전인 우즈베키스탄전까지도 사실 고정운은 평소처럼 상대 측면을 초토화시키다시피 하며 거의 골에 가까운 슈팅들을 뿜어냈으나, 하필 그의 백업인 이상윤이 극적인 결승골을 뽑아내며 존재감이 묻혔고, 이후 3차전인 [[도쿄 대첩(축구)|한일전]]에서의 역대급 실책으로 인해, 이후 월드컵 아시아 지역예선 내내 뭐에 씌였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극심한 슬럼프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된다. 당시 지역예선에서 [[최용수]] 다음가는 맹활약을 한, 고정운의 대체자원인 [[이상윤(축구인)|이상윤]]의 상승세가 두드러졌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포지션 경쟁에서 밀렸다. 상술한 1997년 9월 28일 한일전 당시 아군진영으로 공을 몰고가다가 빼앗기면서 일본의 미드필더 야마구치 모토히로에게 선제골을 허용하는 빌미를 제공하는 뼈아픈 실수를 저질렀다. 한마디로 [[설기현|원조 역주행이었다]].[* 설기현과 고정운 두 선수가 모두 런닝 크로스가 대표팀 역대급으로 정확하다는점에서도 더욱 비슷하다.] 사실 당시 장면을 되돌아보면 고정운의 실수 이후에 수비진이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부분도 있고, [[김병지]]의 머리 위를 넘긴 야마구치 모토히로의 로빙슛이 워낙 절묘하기도 했기에 실점 장면이 완전히 고정운만의 잘못이라 하긴 뭐하지만, 당시 경기가 하필이면 [[한일전]]이었다는 점, 그리고 평가전도 아닌 월드컵 최종 예선이라는 중요한 경기였다는 점에서 많이 까였다. 그나마 서정원과 이민성의 골로 역전했기에 망정이지, 그대로 패하거나 비겼어도 두고두고 씹힐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 국대에서 에이스급이었던 고정운은 내리막을 타기 시작했다. 나이가 이미 32세에 들어서 노장축에 들기도 했지만 도쿄 대첩에서의 저 실수의 여파때문에 98년 월드컵에서도 낙마했다.[* 당시 경기를 중계하던 [[송재익]] 캐스터는 "저건 웬 패스인가요?" "이상한 짓을 했어요" 라고 대놓고 비난했다.] 이후 [[차범근]] 감독과 불화설마저 터지며 논란이 됐고, 그 시기를 끝으로 국가대표팀에 부름받지 못했다. 국가대표팀에서의 전성기가 짧은 편에 속하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는 [[1994 FIFA 월드컵 미국]]에서의 임팩트 있는 모습에 비해 저평가를 받고 있는 선수 중 한 명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