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이왕 (문단 편집) == 생애 == 234년 [[사반왕]]이 나이가 어리고 정사를 처리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폐위된 뒤 왕위에 올랐다 238년 정월 하늘에 [[제사]]를 지냈으며 [[북(악기)|북]]과 [[피리(악기)|피리]]를 사용했다고 하는데 [[군악대]]의 시초로 보인다. 246년 [[위나라]][* 《[[삼국지]]》에 나오는 위나라다. 당시 [[황제]]는 [[조방]]이었다.]가 [[고구려]]를 침략하는 중이었다.([[비류수 전투]]) 고이왕은 이 틈을 타 위나라의 [[낙랑군]]의 변방을 공격하였다. 더불어 낙랑군과 [[대방군]]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을 때 대방군을 공격하여 태수 [[궁준]]을 전사하게 한 배후에도 고이왕이 이끄는 백제의 [[힘]]이 작용하였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246년에 일어난 전투를 [[기리영 전투]]라고 하는데 아직 [[한사군]]에 맞서 싸운 기리영 전투의 주체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들이 많다. 현재 가장 신빙성이 있는 의견은 3가지로 [[목지국]], 백제의 고이왕, [[신분활국]]이다.] 고이왕은 남[[옥저]]의 일부를 점령하고 중국의 [[통일]] 왕조인 [[서진]]과 [[외교]] 관계를 맺었으며 현재 [[충청남도]] [[천안시]]의 영역에 자리잡았었다고 추정되는 마한의 목지국(目支國) 세력을 압도하여 이전의 관계를 청산하고 마한 전체의 실질적인 영도 세력으로서의 위치를 확립했다.[* 고이왕의 백제가 마한 목지국의 세력을 압도하게 된 계기가 《[[삼국사기]]》 등 주요 [[역사서]]에 직접적으로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기타 문헌 및 정황상 [[기리영 전투]]와 관련이 있다고 추정된다.][* 고이왕 대에 마한 관련 기사가 있는 것은 아니고 《삼국사기》의 [[온조왕]] 24~27년 기록의 원래 연대를 고이왕 대로 추정한 것.[[https://db.history.go.kr/id/sg_023r_0020_0380|출처]] [[고고학]]적으로는 《삼국사기》상 고이왕~[[책계왕]] 재위기에 천안 청당동의 마한 목지국 세력이 갑자기 큰 쇠락을 경험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현재 [[강원도]] 북부에 자리잡은 [[동예]]가 자주 침범해오자 동예와 우호 관계를 조성하기도 했고 한사군의 후신인 낙랑군 및 대방군과도 [[혼인]]을 통한 [[동맹]] 관계를 형성하는 등 적극적인 대외 [[정책]]을 펼쳤다. 260년 봄 정월, 기존의 좌•우보 체제를 [[개혁]]하여 [[좌평|6좌평]] 제도를 두고 관등을 16품계로 나눠 정비했으며 [[관직]]의 위계에 따라 자색, 비색, 청색으로 다른 옷을 입게 하고 [[왕]]과 [[귀족]]에 대한 [[옷]]을 정하는 등 공복 제도를 정했는데 [[왕권]]의 강화로 이어졌으며 백제가 [[부족]] 연맹체에서 고대 [[국가]]로 발돋움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다만 고이왕의 업적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성왕(백제)|성왕]] 대의 것이 고이왕 때로 앞당겨져 기록되었다고 보는 [[학자]]들이 많다. 그도 그럴 것이 6좌평 제도를 비롯한 각종 제도들은 같은 시대 [[중국]]의 제도보다 발전된 것이기 때문. 물론 지나친 확대 해석은 피해야 하지만 백제가 중국에서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여 발전한 것이 사실인데 그걸 감안하면 중국의 것보다도 앞선 통치 체제를 운영했을 수는 없는 일이다. 기록을 살펴봐도 알 수 있지만 6좌평의 명칭은 후대에 가서 나오고 6좌평에 들어가지도 않는 좌평 명칭인 [[상좌평]]이 나오기도 하며 기록이 부실해서일 수도 있지만 고이왕 대에 확인되는 좌평이 2명밖에 없다. 이러한 문제로 [[교과서]]에서도 6좌평 제도를 마련한 왕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으며 그냥 백제에 이런 제도가 있었다는 식으로만 언급한다. 고이왕 때에 공복 및 관등 등 백제의 기본 정치 구조의 뼈대를 만들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신뢰할 수 있다고 한 것은 [[이병도]]였다.] 260년 [[서해]]의 큰 [[섬]]에서 [[사냥]]을 하며 직접 40마리의 [[사슴]]을 [[활]]로 쏘아 잡았다는 [[https://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19&totalCount=19&prevPage=0&prevLimit=&itemId=sg&types=r&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sg_024r_0030_0020&position=-1|기록]]이 있으며[* 사열식에서는 날아가는 [[기러기]] 1쌍을 활로 쏘아 맞혔다는 [[https://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19&totalCount=19&prevPage=0&prevLimit=&itemId=sg&types=r&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sg_024r_0030_0090&position=-1|기록]]도 있다.] [[활쏘기]]를 잘했을 정도로 [[무예]]가 뛰어나고 호방한 [[성격]]이었다고 전해진다.[[https://www.daejon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047351|#]] 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사냥을 갔다는 기록을 보아 사냥을 통해 군사를 [[훈련]]시키고 인재를 선발하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던 걸로 보이며 자신의 위엄을 더욱 돋보이게 하려는 이유도 있었던 것 같다. [[율령]](형법과 행정법)을 반포하고 내정을 크게 정비했는데 고이왕 때 정비된 체계가 백제의 [[멸망]] 때까지 정확히 400년[* 260~660년]간 이어지게 된다. 사실 고구려나 신라는 [[소수림왕]], [[법흥왕]] 때 율령을 반포했다고 기록에 써 있지만 백제는 정확한 율령 반포 시기에 대한 기록이 없다. 단 《[[삼국사기]]》 고이왕 29년(서기 262년)에 '[[관리]]로서 재물을 받거나 [[도둑]]질한 자는 장물의 3배를 징수하고 종신토록 금고하게 하라고 명령했다'라는 기록을 율령 반포의 근거로 보아 교과서에서는 고이왕 때 율령 반포를 했다고 가르친다. 고이왕은 재위 기간 내내 괴곡, 봉산을 중심으로 자주 [[신라]]와 충돌했으나 이렇다 할만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는데, 해당 일이 실제로 있었다면 적어도 분서왕 ~ 비류왕 재위기일 가능성이 높다. 신라가 본격적으로 백제와 [[국경]]을 마주하는 시기는 한참 뒤인 기원후 4세기이기 때문이다. 일단 적어도 고이왕 때까지는 목지국이 위신이 추락하긴 했어도 여력은 보존하던 때이고, 백제의 직접 지배지 전진은 목지국이 위치한 충남 일대에서 더뎌지는 한편 전북 서해안으로 더 깊게 내려갈 정도기에, 적어도 그때는 백제군이, 백제에게 완전히 복속하지 않고 저항을 멈추지 않는 목지국을 타넘어 진한 지역까지 나타날 시기는 아니었다. 물론 백제가 고이왕 시기에 본격적으로 돌입한 내치의 정비 및 확장에 힘입어 [[한강]] 유역을 벗어나 남하하기 시작했고, 그런 과정에서 목지국을 무력화하고 목지국 휘하에 있던 충청도 마한 거수국들을 흡수하면서 [[충청도]] 북부 지역까지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해 사로국의 영향력 아래 있는 진한 소국들과 마찰을 빚게 되지만, 적어도 고이왕 때는 그런 일이 일어날 상황이 아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