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양이/역사 (문단 편집) === 중세 및 근대 유럽 === || [[파일:external/i0.wp.com/CatNun.jpg|width=100%]] || || 고양이와 실타래로 놀아 주는 수녀 삽화.[* 출처:삽화집 The Maastricht Hours 14세기 [[벨기에]]] || 고양이는 인간과 공존하게 되었지만, 육축용으로나 노동력의 제공 어느 면에서도 쓸모를 느끼지 못한 지역에서는 고양이를 불길한 동물이라 하여 때려잡거나 먹었다. 중세 및 근대 유럽에서는 [[마녀]]의 [[패밀리어]]라는 인식 때문에 박해를 받게 된다. 조금 더 부연 설명을 하자면, 본래 마녀라는 개념은 유럽 사회에서 동네 점쟁이 내지는 무당의 개념에 가까웠다. 그리고 이 점쟁이들이 자주 키우는 애완동물이 고양이였는데, 중세 말기부터 근대 시기에 이런 마녀들에 대한 사회적 숙청 작업([[마녀사냥]])이 시작되면서 고양이까지 쌍으로 이 일에 엮여든 것이다. 때문에 고양이들을 죽이거나 마녀재판에 고양이들을 같이 산채로 불태워 죽이는 일도 꽤 있었다. 여기에서 아홉 개의 목숨이 있다는 이야기가 추가되었고, [[나인 라이브즈]]라는 별명이 붙는 원인이 되었다.[* 이러한 고양이 박해의 원인에는, [[북구 신화]]의 여신 [[프레이야]]가 고양이가 끄는 전차를 탄다는 설정 때문으로, '이교도의 상징물 = 악마'라는 논리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다. 다만 이 설은 신빙성이 낮은데, 당시의 유럽인들에게 이교도의 상징물이라고 해서 박해하지 않을 정도의 지성은 있었다. 당장 [[독수리]]만 하더라도 로마인들이 [[유피테르]](제우스)의 상징물이라면서 깃발에 박아놓았던 것이지만 [[동로마 제국]]부터 후대의 유럽 국가들은 그게 간지난다면서 독수리 깃발 잘만 돌려썼고(...) 심지어 [[용]](드라코)은 성경에서는 악마, 사탄의 상징임에도 동로마 제국에서는 그걸 그대로 버젓이 [[군기]]로 쓰기도 했다. 또한 고대 이집트 다신교의 문물인 [[오벨리스크]]가 크고 아름답다는 이유로 [[성 베드로 대성당]] 한복판에 떡하니 박아놓기도 했고 [[1430년]] 기사 수도회에 '[[황금양털]] 기사단(Orden del Toisón de Oro)'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교회에서 "이거 이교도들 건데 좀 그렇지 않아?"라고 찝찝해 하는 소리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어차피 이교도들의 신들은 존재하지 않는 허구의 존재들이잖아. 오벨리스크를 박아놓든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든 그게 뭐 어때?'''"에 가까운 마인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타문화들이 본격적으로 공격 받은건 [[종교개혁]] 이후 프로테스탄트 측에서 가톨릭 측에 기독교의 순수성 논쟁을 건 이후이다.] 1233년 6월 13일, 로마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Vox in Rama'라는 칙령에서 '''검은 고양이'''는 사탄의 분신이라고 하여 고양이 지옥 시대가 열렸다. 이것이 기독교가 고양이를 학대했다는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모든 고양이는 아니고 검은 고양이만이다. 원래 교회 가르침대로라면 검은 고양이만 죽여야 하는데, 죽이는 김에 다른색 고양이까지 죽이는 일도 당연히 많았다. 다만 아래 나오듯 교회가 다른색 고양이는 귀여워하던 일도 꽤 있었던 모양이다.[* 모순되는 말 같지만, 중세 교회야말로 교황의 말을 철저히 따르는 집단이었으니 다른색 고양이까지 잡아죽일 필요는 별로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교회의 가르침을 대충 전해들은 농민들이 검은 고양이를 죽이는 김에 그냥 다른색 고양이까지 싸잡아 죽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유럽에서는 1200년대에서 1300년대까지 검은 고양이는 물론이고, 다른색 고양이도 학살당하는 등 고양이 학살이 가장 심했고 그게 흑사병의 원인 중 하나라는 말이 있다. 또한 이런 인식 때문에 고양이가 [[흑사병]]을 옮긴다는 오해가 만들어지면서 인식이 더 안좋아지는 악순환까지 일어났다. 그러다 14세기부터 교황의 권위가 떨어지고, 유럽 전체가 [[흑사병]]으로 사람이 마구 죽어나가 정신없던 통에 차츰차츰 흐지부지 되었다. 이 고양이 학살에 대해서 흔히 '쥐가 흑사병의 매개인데 고양이를 잡는 바람에 쥐가 창궐해서 흑사병이 더 창궐했다'는 말이 상식처럼 퍼져있다. 현대 의학의 관점으로 보면 이 상식도 살짝 틀린 것인데, 흑사병에 감염된 고양이가 사람을 물거나 하면 흑사병을 옮길 수 있으며 흑사병의 중간숙주인 쥐벼룩 또한 고양이에게 기생이 가능하다.[* 외국에서 캣맘이 길고양이에게 물려 흑사병에 감염된 사례가 다수 있다.] 다만 중세는 도시 안에도 마구간과 축사를 짓던 시절이며 털짐승 전체가 같은 기전으로 흑사병의 매개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딱히 고양이나 쥐만 흑사병의 주범이라고는 할 수 없다. 때문에 고양이는 패닉에 빠진 사람들에게 애꿎이 희생된 것은 맞다. 1648년 단 '''10살'''이던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는 30년 전쟁 종전 기념으로 고양이 화형식을 열어 직접 고양이를 불구덩이로 내던져 태워죽이고 잔치를 열었는데 밑에 서술하듯이 루이 14세를 이어 제위한 루이 15세가 고양이를 무척 좋아하던 걸 생각하면 참 기묘하다. 그밖에 1665년 런던의 흑사병 발병이 고양이 탓이라고 하여 고양이 20만 마리 이상을 태워죽인 적이 있다. 이 흑사병 창궐로 당시 런던에 유학 중이던 [[아이작 뉴턴]]이 런던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온 바 있다.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영국]]에서는 새끼 고양이들을 자루에 담아 돌을 넣고 강에 던져 버리는 일도 빈번했다고 한다. 이로 보아 구미(歐美) 쪽에도 고양이를 불길하게 여기는 관념은 존재했던 듯하다. [[검은 고양이]]라는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을 참고하자.[* 아이러니컬하게도 포는 애묘인이었다고 한다. 가난에 시달려 난방을 제대로 할 돈도 없을 때 키우던 고양이를 안고 그 체온으로 추위를 견뎠다.] 시대가 앞서긴 하지만, [[로빈슨 크루소]]를 읽어봐도 애완묘 두 마리를 제외한 고양이들을 죄다 총으로 쏘아 죽이거나 야생으로 쫓아내고, 애완묘들이 낳는 새끼는 물에 빠뜨려 죽이는 장면이 있다. 그 밖에도 '고양이 오르간'이라고 해서 고양이 괴롭히기 악기까지 있었다. 오르간 안에 살아있는 고양이를 묶어두고, 오르간을 연주할 때마다 고양이 몸이나 수염, 꼬리가 당겨졌다. 당연히 고양이는 고통에 비명을 질렀고, 이 고통소리가 악기소리였다고 한다. 또한 중세 유럽인들은 고양이 목숨 내기라는 내기까지 했는데, 고양이 꼬리에 무거운 돌을 매달고 물에 집어넣고 얼마나 견딜 수 있나 하는 내기를 즐겨했다. 아주 드물게 사람을 구했다든지 해서 대우받던 일부 고양이[* 16세기 잉글랜드 귀족 헨리 와이어트란 인물이 런던탑에 갇혀서 굶어죽게 되었을 때, 한 도둑고양이가 새나 쥐를 잡아서 그가 갇힌 곳에 들어왔다고 한다. 굶어죽느니 그거라도 먹자 해서 살아남을 수 있었는데, 이 귀족은 고양이 덕분에 목숨을 구했다고 여겨서, 나중에 석방될 때 그 고양이를 소중히 데려가서 평생을 애지중지 돌봐줬다는 이야기가 있다.]도 있지만, 당시 고양이는 이렇게 실컷 죽여도 되는 존재였다. 고양이 박해 및 학살은 18세기에서도 수가 엄청 줄었어도 종종 벌어졌다. 18세기 영국과 프랑스에서도 일부 시골 지역에 [[마녀재판]]이 벌어졌는데 사람 대신 고양이를 태워 죽여 액땜을 했다. 물론 이게 알려지자 엄청나게 비난받았고, [[에드워드 기번]]이나 [[볼테르]]가 해당 사건들을 격렬하게 성토하며 법적 금지 및 처벌을 주장하던 것도 유명하다. 그리고 마녀재판도 아님에도 고양이를 죽이는 액땜도 많았는데 [[벨기에]] 이프르 지역에서는 5월이면 고양이를 높은 성탑에서 내던져 죽이면 악귀가 물러난다고 하여 많은 고양이가 이렇게 끔살당했다. 놀랍게도 이런 '''고양이 끔살은 1970년까지 이어졌다가''' 당시에 동물학대 및 미신에 미쳤다는 비난 속에 고양이를 던지는 게 금지되고 대신 고양이 인형으로 대신하여 지금도 고양이 인형을 내던지는 풍습이 이어지고 있다. 다만 이 시기의 유럽 사회에서도, 고양이는 여전히 나름 메이저한 애완동물이기도 했다. ~~진짜로 다 때려잡았으면, 박해할 고양이가 애초에 남아있지 않았을 테니~~ 곡식을 저장하는 곳에서는 여전히 쥐를 잡기 위하여 고양이를 키웠다. 또한 황당할지도 모르지만 고양이에 대한 대우가 가장 좋은 곳은 오히려 교회였다. 특히 수도원에서 쥐를 잡기 위해 고양이를 키웠다는 기록이 무척 많이 남아 있다. 수도원은 자체적으로 농사를 짓고 서적 필사 또한 수도원의 주요 과업이었는데, 양피지를 쥐가 쏠아버리는 일이 많기 때문에 고양이와 친할 수밖에 없었다. 1400년대 잉글랜드 엑세터 대성당에서 쥐를 잡기 위해 고양이를 주급 1페니(물론, 1페니 어치의 먹이로 추정된다)로 고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수녀원에서는 대접이 아주 좋아서 많은 [[수녀]]들이 고양이를 애완동물로 키웠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다른 동물은 다 안되지만 고양이만은 애완동물로 허용한다는 규칙도 남아 있을 정도였다.[[http://www.all-creatures.org/ca/ark-209-2.html|##]] 그러한 이유로 수녀인 성녀들 중에서 고양이와 함께한 모습의 성화가 그려진 것을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노리치의 율리안나와 니벨레스의 제르투르다와 같은 인물이 있다. 그 밖에도 웨일스의 국왕 허우엘 다(Hywel Dda)가 고양이를 죽이는 걸 금지했다던지, 고양이가 쥐로부터 성을 지키는 유머러스한 삽화(14세기)가 남아있다던지 해서 의외로 중세 유럽에서도 무조건 박해받지 않고 애완동물로서 대접받고 살았던 녀석들도 꽤 있었던 듯하다. 그리고 놀랍게도 16세기까지 이탈리아 일부 지역에선 여신 디아나의 분신으로 고양이를 우대하기도 했다. 훗날 에스파냐 국왕에 오르는 [[펠리페 2세]]는 아버지인 [[카를 5세]]에게 성경 어디에 고양이가 악마라고 나오지도 않는데, 고양이를 태워 죽이는 게 무슨 기독교 신앙이냐고 반문하기도 하였다. 또한 유럽에서도 고양이로 팔자 펴는 동화가 존재한다. [[장화신은 고양이]] 이야기 이외에도 보통 '위팅턴과 고양이'라고 알려진 이야기로, 가난한 청년 딕 위팅턴이 런던으로 상경하여 한 부잣집에서 하인으로 일하는데 숙소에 쥐가 무척 많아 길거리에서 새끼고양이를 사다가 길렀다. 부잣집 주인인 피츠워렌은 무역상으로 상거래를 위해 떠나는 길에 딕의 고양이를 함께 가져갔다. 이후 어느 나라에 도착하여 왕을 배알하였는데 그 나라에는 고양이라는 동물이 없었다. 성대한 잔치자리에 쥐가 판을 치자 피츠워렌은 쉽캣이었던 딕의 고양이를 데려와 쥐를 잡게 하고, 왕은 고양이를 자신에게 팔라고 한다.[* 왕과 왕비는 처음에는 악귀처럼 쥐를 잡는 고양이를 맹수라도 되는 양 두려워했으나 피츠워렌이 고양이를 안고 쓰다듬어주자 고양이는 피츠워렌에게 애교를 부렸고, 이를 본 왕비도 용기를 내어 고양이를 쓰다듬어 본다.] 왕은 고양이 값으로 왕가 재산의 반을 피츠워렌에게 건네주었다. --혜자 --피츠워렌은 런던으로 돌아와 고양이를 판 돈을 딕에게 건네주고, 딕은 이후 거상이 되어 돈을 많이 벌었으며 피츠워렌의 딸 앨리스와 결혼하고 런던 시장의 자리에까지 오른다. 다만 이 동화는 이슬람권 고양이 동화를 베껴 만든 것으로 1350년대 영국의 실존 인물이자 거상이었던 리처드 위팅턴의 생애와 고양이로 부자가 된 페르시아 고아의 이야기를 동화로 재구성한 것이다. 이후 근대에 접어들면서 고양이는 다시 사람들 곁에서 친근하게 번식했다. 15~17세기의 소위 [[대항해시대]] 및 그 이후 근대까지도 배에 타는 쥐를 없애기 위해 고양이를 태웠다.[* 대항해시대 시리즈에서도 이를 반영하여 고양이가 아이템으로 나온다. 2편의 예를 들어보면 쥐떼가 나타났을 때 사용하면 쥐떼가 사라지며, 평상시에 사용하면 그냥 야옹~ 하는 대사만 나온다.] 심지어 [[어니스트 섀클턴|남극 탐험선]]에도 타면서 전 세계를 돌아다니게 된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서 고양이의 대우가 마냥 좋아졌던 것만은 아니기도 했다. 가령 로버트 단턴의 <고양이 대학살>에서는 18세기, 1730년대에 프랑스 생-세브랑 가의 인쇄소에서 인쇄공들이 벌인 무자비한 고양이 대학살 사건을 소재로 다루고 있다. 읽다보면 유럽에서 고양이의 사회적 대우가 상당히 이중적이고 모순적이라는 느낌이 들 수 있는데, 사실 이는 딱히 유럽에 국한된 문제도 아니고 고양이에만 해당하는 문제도 아니다. 동물도 생명이므로 사사로이 죽여서는 안된다는 개념이 형성되지 못했던, 전근대시기의 흔한 야만성 중 하나라고 봐야 할 것이다. 당장 [[도도새]]의 멸종 이유 중 하나가, 유럽인들이 단지 '재미로' 죽였기 때문이기도 하고, 한국의 경우도 서구의 현대적 애완동물 개념이 보급되기 전에는 개나 고양이를 때려죽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조선 이전에도 농경사회였던 한반도에서 개와 고양이는 소나 닭 등의 다른 가축을 지키거나 쥐 등으로부터 저장된 곡식을 지키는 가축으로 쉽게 잡아먹거나 죽이지 않았다. 다만 춘궁기 등이 닥칠 때 먹을 것이 없거나 혹은 고기 등의 단백질을 공급해 주어야만 하는 환자 등을 위하여 농사의 필수품인 소를 잡을 수는 없으므로 대신 잡아먹는 경우는 있을지라도 이 역시 그리 흔한 경우는 아니였다. 서민의 삶이 담겨있는 풍속화나 민화 등의 소재로도 즐겨 나오며, 이를 통해서도 쉽게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이다.--[[파적도|고양이가 병아리를 물고 텨텨]]하는 풍속화도 있다는 게 함정--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