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력사 (문단 편집) == 생애 == 본명은 풍원일(馮元一)로, 고력사라는 이름은 훗날에 개명한 것이다. 조부 이전에는 대대로 벼슬을 지냈던 집안이었으나, 아버지 풍군형(馮君衡)이 죄를 지어 관직과 가산을 몰수당했고, 풍원일은 10세의 나이로 [[노비]]가 되었다. 698년에 [[환관]]이 되어 궁으로 들어가 [[측천무후]]를 모셨다. 이름이 고력사로 바뀐 사정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기록이 전한다. [[신당서]]와 [[구당서]]에 의하면, 당태종의 셋째 아들 이각의 아들 이천리가 풍원일과 또 다른 환관을 궁에 바치면서 금강역사(金剛力士)에서 따와 금강과 력사라는 이름을 지어주어 풍력사가 되었고, 나중에 죄를 지어 측천무후에게 매를 맞고 궁에서 한 번 쫓겨났을 때 환관 고연복이 양아들로 받아들여 고력사가 되었다고 한다. 1971년 발견된 고력사의 신도비에 의하면, 고력사의 성과 이름은 측천무후가 고씨 성을 내리고 이름을 력사로 고치게 하여 바뀌었다고 한다. 하지만 고력사의 아버지 풍군형의 묘지명에는 고력사가 어렸을 때에 고연복의 양자로 들어가서 성이 바뀌었다고 되어 있다. 한편 고력사의 양부 고연복[* 여담으로 고연복은 고구려 유민이며, [[영류왕]]의 태자였던 [[고환권]]이 그의 증조할아버지라는 지적이 있다.]의 묘지명에는 이에 대한 특별한 언급이 없다. 이후 고력사는 [[당현종]]의 최측근 환관이 되어 당현종의 치세 동안 막강한 권세를 누렸다. 수많은 재상들이 뜨고 지던 당현종 곁에 머물며 그를 보좌하였고 이 때문에 사실상 당현종의 진정한 최측근으로 활동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당숙종]]의 측근이자 실권자였던 [[이보국]][* 이 사람도 환관이었다.]이 당숙종과 당현종을 이간질해서 현종을 사실상 유폐시켰을 당시에도 가장 먼저 한 일이 바로 고력사를 유배형에 처하여 당현종 곁에서 떼어내는 것이였다. 이후 고력사는 늘그막에야 유배형에서 풀려나 간신히 장안에 돌아올 수 있었지만, 그 때에는 이미 현종과 숙종이 모두 죽은 후였다. 이에 고력사는 충격을 받은 나머지 7일간 식음을 전폐하며 슬퍼하다가 피를 토하고 죽고 말았다.[* 다만 사망했을때의 나이가 78세로 당시로서는 상당히 장수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