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려실록 (문단 편집) === 보관 === >[[고려사]] 卷三十. 世家 卷第三十. 忠烈王 18年. 1월. '''실록을 [[선원사]]로 옮기다''' >1292년 1월 24일(음) 정사(丁巳) , >1292년 2월 13일(양) >---- >'''실록을 강도 [[선원사]]'''로 옮기다. 丁巳 移置先代實錄于禪源寺. 총 5부를 두었던 조선왕조실록과는 달리 1227년에 외사고를 짓기 이전까지는 오직 1부만 있었으며, 이 때문에 유실되는 경우가 많았다. 7대 실록 부터가 거란의 침입으로 사료를 몽땅 날려먹어 덕종 때 새로 만들어진 것이고, 1126년(인종 4년) [[이자겸의 난]]으로 궁궐이 불탈 때에도 실록이 유실될뻔했지만 직사관 김수자(金守雌)가 노력해서 실록이 보존될 수 있었다. 1227년 명종실록을 편찬할 때, 드디어 [[해인사]]에 외사고를 지어 이때부터 2부를 보관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내사고 실록은 1232년(고종 19년) [[여몽전쟁]] 때 강화도에 옮겨질 당시 피해를 입었고, 1286년(충렬왕 12년)에는 몽땅 [[원나라]]에 보내져 뜯겨 본후, 1290년에 반환되었다. 이후에도 [[강화도]] [[선원사]], 개경 등을 옮겨다니다가 결국 1361년(공민왕 10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개경이 함락되었을 때 내사고본은 소실되었다. 해인사의 외사고본은 여몽전쟁 때 남해군의 창선도(昌善島)에 옮겼고, 이후 우왕 대에 왜구가 대규모로 침입하면서 [[진도군]], 선산 득익사(得益寺), [[예천]] 보문사, 충주의 개천사(開天寺), 죽산([[안성]])의 칠장사(七長寺) 등으로 계속 옮겨다녔다. 이후 떠돌아다니던 걸 조선 초기 [[고려사]], [[고려사절요]]를 편찬할 때 한양의 춘추관 사고에 옮기고, 이후 이곳에 보존하였으나 조선왕조 기준 이미 지난 왕조의 실록인데다 고려사로 내용을 간추리는 작업도 완료했으니 굳이 사본을 만들지는 않았고, 결국 [[임진왜란]] 때 불타 사라졌다. --계속 해인사에 있었다면 [[팔만대장경]]과 같이 남았을텐데--[* 허나 조선 입장에서는 그럴 수는 없는 입장이긴 했다. 팔만대장경이야 불경인 만큼 조선 입장에선 있으나마나의 하찮은 물건이라 해인사에 있건말건 알 바 아니었으나 고려실록은 전 왕조의 역사서라는 매우 중요한 물건이었기에 이런 중요한 물건을 나라에서 관리하려고 하는건 당연할 일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