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려시대 (문단 편집) == [[여말선초|고려 말기]]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40px-History_of_Korea-1374.png|width=100%]]}}}||{{{#!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study.zumst.com/%EA%B3%B5%EB%AF%BC%EC%99%95%EC%9D%98%20%EC%98%81%ED%86%A0%20%EC%88%98%EB%B3%B5.png|width=100%]]}}}|| || '''고려 말엽 [[공민왕]] 때의 영토'''[* 동북면([[쌍성총관부]])을 수복한 이후의 강역이다. [[위키백과]]에는 1374년의 고려 영토라고 기재되어 있다.] || '''[[공민왕]]이 수복한 동북면 ([[쌍성총관부]])''' || [[충혜왕]]의 사후, 충혜왕의 어린 아들인 [[충목왕]]과 [[충정왕]]이 뒤를 이었으나 둘다 얼마 안 가 요절했으며, 홍건적의 난 등의 반란 크리가 터지며 원 제국은 70년만에 몰락의 조짐을 보였다. 뒤를이어 1351년 왕위에 오른 [[공민왕]](충혜왕의 동복 아우)은 무너져가는 원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반원 정책을 펼쳤다. 고려는 다시 부흥하는 듯 보였다. 공민왕은 대표적 권문세가였던 기씨 일족을 숙청하고 몽골풍의 양식과 변발을 금지시켰으며, [[정동행성]](특히 이문소)를 폐지한 뒤 군대를 동원해 [[쌍성총관부]]를 점령하여 옛 강역을 회복했다(병신정변, 1356). 심지어 일시적이나마 '''요동을 공격하는''' 모습에서 정점에 달한 모습을 보인다. [[이성계]]가 [[압록강]]을 [[오녀산성]] ([[졸본]])은 물론 요동의 중심부인 [[제1차 요동정벌|요양을 점령한 적이 있으나]] 군량 부족과 [[나하추]]의 게릴라전 때문에 결국 오래 유지하지 못하고 퇴각한 사례. 이 사실 덕분에 위화도 회군에 대한 떡밥이 더욱 풍부해진다. 그러나 [[중원 #s-1|중원]]의 혼란 속에 일어난 [[한족]]의 농민 반란군인 [[홍건적]]이 수도 [[개경]]까지 쳐들어와 공민왕이 안동까지 몽진하는 사태가 일어났고, [[규슈]]의 [[왜구]]가 삼남 지방은 물론 서해도 ([[황해도]]), 수도인 개경 부근과 지금의 [[함경도]]까지 터는 위기의 시대이기도 했다. 이후 공민왕은 [[노국대장공주]]의 죽음과 [[신돈]] 숙청 이후 초심을 잃고 [[혼군]]이 되어 횡음에 빠졌고, 결국 시해까지 당하면서 고려 왕조 멸망의 단초를 제공하고 말았다. 다만 공민왕의 말년 행보에 대해선 조선 왕조의 개국 당위성을 위한 왜곡이 어느 정도 들어간 게 아닐까 하는 견해도 있다. 어쨌든 공민왕의 치세를 기반으로 하여 향리 계급에서 비롯된 신진 [[사대부]]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원명 교체기로 외적이 침입이 끊이지 않은 혼란 속에 신흥 무인([[최영]], [[태조(조선)|이성계]]) 세력들이 성장한다. 원명 교체기의 혼란 속에 일어난 원나라와의 전쟁, 홍건적의 침입,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등은 탄탄한 사병을 가진 이들이 성장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최영과 이성계는 공민왕의 아들로 어린 나이에 공민왕 시대의 권신 이인임의 지원에 힘입어 왕위에 오른 [[우왕]] 대에 [[이인임]]을 비롯한 권문세가 일당들을 숙청하고 어느 정도 국가 체제를 재정비하고 본격적으로 요동 정벌을 실현하려는 듯하였으나 당시는 고려 멸망 4년 전이었다. 원간섭기 이후 이 고려 멸망기까지의 상황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실제로는 한국사 전체에서도 손꼽히는 '헬게이트'에 가까웠다. 계속되는 외부의 침입과 권문세족들이 남긴 각종 폐해로 인해 고려의 민생은 문자 그대로 파탄 상태이었으며 고려 조정의 통제력은 사실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황산대첩]] 등으로 고려의 최고 영웅으로 떠올랐던 이성계가 (지금까지 역사 속의 가장 큰 떡밥이 되는) [[위화도 회군]]을 일으킨다. 가능성이 있었다고 하는 쪽에선, 실제로도 나중에 조선 대에 들어서 태조와 정도전이 요동 정벌을 계획하였다는 것과 [[명나라]] [[홍무제|태조 주원장]]이 고려와 조선의 강병이 요동으로 치고 올라오는 것을 두려워했다는 것에 근거를 둔다. 반대 측에서는 성공했다 할지언정 과연 그것이 국가가 재정비되는 시기에 도움이 되었을지는 의문을 제기한다. 새로 일어나는 명과 맞서야 했으니 당연히 엄청난 국력이 소모되었을 터라는 것. 앞서 보았듯이 고려는 압록강을 한번 넘었으나 곧바로 회군했다. 이성계는 최영을 제거, 우왕을 폐위하고 잠시 그의 아들 [[창왕]]을 옹립했다가, 그들이 요승 [[신돈]]의 자식이라는 선전으로 쫓아낸 뒤, 그 다음 [[공양왕]]을 세워 몇가지 개혁안을 수행시켰다. 그리고 이때 [[정몽주]]가 이성계를 궁지로 몰며 저항했으나 결국 [[이방원]]이 그를 [[선죽교]]에서 살해했고, 4개월 뒤(음력 7월 16일) 이성계는 "권지고려국(왕)사"로 [[선양]] --찬탈-- 을 받았다. 고려는 역성혁명의 반발을 우려한 이성계의 조치로 6개월간 이름만 존속되다 1393년 음력 2월 15일 명의 승인으로 조선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고려는 475년만에 멸망했다. 보통 왕씨 왕조가 종말을 고한 1392년을 조선 개국으로 보아 474년만에 멸망했다고 본다. 1403년에야 [[태종(조선)|태종 이방원]]이 명나라로부터 고명(誥命)과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을 받아 왕호를 쓰기 시작했다. 무려 '''500년''' 가까운 기간동안 존속했으나 1170년 무신 정변 이후에는 이미 멸망해도 상관없을 정도로 위험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는데도 천운인지, 아니면 뒷감당할 수단이 있었는지 꽤 오랫동안 버텨왔다는게 놀라운 역사라 하겠다. 후세의 조선도 왕조 멸망을 가까스로 피한 양란을 겪고도 200년 넘는 시간을 버틴 점은 유사하지만, 조선의 경우 중앙 집권 체제로 고려보다 안정적인 통치가 가능했고, 양란 이후 외세의 침입 이전까지 대체적으로 고려보단 안정적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