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고려시대 (문단 편집) === 최씨 정권과 말기 === 이의민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한 [[최충헌]]은 경대승이 취했던''' 권력 정책을 계승했다. 즉, 중방을 더욱 무력화시키고 자신의 사조직인 '[[교정도감]]'을 새로이 권력 기구로 만들고 도방을 부활시켜 사병을 기르는 등 이전 무인들보다 더욱 강력한 독재 체제를 구축한다. 이런 안정된 권력은 '''최씨 세습 정권으로 이어진다. 이전 집권자들이 당시의 고려 왕 명종과 함께 공존을 했다면 [[최충헌]]에겐 그런 건 없었다. 최충헌 시대 25년간 왕은 무려 5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2명은 최충헌이 폐위한 것([[명종(고려)|명종]], [[희종(고려)|희종]])이었고, 거꾸로 두명([[신종(고려)|신종]], [[강종(고려)|강종]])은 옹립했다. 그는 독재 체제를 구축한 이후 권력을 자신의 아들 [[최우]] (혹은 최이)에게 물려줬으나 때마침 [[몽골 제국]]이 고려로 쳐들어 오면서 더 커다란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건국 313년 만이었다. 한편 그러면서도 반란과 민중 봉기가 중점적으로 폭발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계속되는 수탈로 인한 민생고와 자연재해에 백성들의 생활은 처참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문벌 귀족들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무신들은 그동안의 울분을 푼다는 듯 더욱더 착취와 폭정을 일삼게 되었고 이에 대한 민중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그러던 중 1173년에 문신 김보당이 의종 복위를 명분으로 난을 일으켰으며, 이듬해에는 서경 유수 조위총이 무신 정권에 반기를 들며 반란을 일으킨다. 그의 반란에 절령 이북의 40여개 성이 호응하는 등 큰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반란은 민중들에게도 번져나가 특별 행정 구역이었던 향, 부곡, 소에 대한 차별 철폐를 내세우며 공주 명학소에서 망이, 망소이 형제가 그리고 최충헌의 사노 출신으로 신분 해방을 꿈꾸던 [[만적의 난]] 등이 연달아 일어났다. 이러한 상황 속 옛 삼국의 땅에서 삼국 부흥을 기지로 내세우며 부흥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서경에서는 최광수가 고구려 부흥을 명분으로 거사했고 1193년에는 경상도의 운문과 초전 지방에서 김사미와 효심이 각자의 세력을 이끌고 결탁, 거대한 규모의 신라 부흥 운동을 일으켰다. 심지어 여몽 전쟁 도중에는 담양 지역에서 백제 부흥을 명분으로 이연년 형제가 난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런 삼국 부흥 운동은 당시 고려 조정과 무신 정권에 대한 반발심과 착취, 폭정 속 처참한 생활을 이어가던 농민들의 분노에서 비롯된 것이나 그때까지도 삼국 분립 의식이 각 지역에 남아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계속된 민란은 결국 무신 집권기 고려의 혼란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1 ☞}}} 이 부분은 [[여몽전쟁]] 문서를 함께 참고하십시오.''' 몽골은 고려에 칩입한 거란의 잔당을 함께 물리친 강동성 전투 이후 고려에 큰 은혜를 베풀었다는 듯 만행을 일삼았고 고려는 불만이 가득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몽골의 사신 저고여가 국경에서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국교는 단절되었고 결국 몽골이 군대를 이끌고 고려를 침략한다. 이에 최우를 필두로 하는 최씨 정권은 몽골과의 전면전은 어렵다고 보았으나, 문신들을 중심으로 제기되는 화친책도 거부하고 입도 정책을 구사한다. 이는 [[강화도]](강도)에 짱박혀 수전에 극도로 취약한 몽골군이 제풀에 물러가도록 하는 방안이었다. 최우는 스스로도 뛰어난 명필이자 문사로 문신들을 중용하면서 성공적으로 고려의 체제에 안착하는데 성공한다. 최우는 입도 정책을 반대한다면 심복 장군들이라 할지라도 목을 날려버렸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본토 침략이 가시화된 3차칩임 이후 육지의 민중들은 전란의 참화에 그대로 방치되었다. 초기에는 [[처인성 전투]] 등으로 소규모 몽골군이 쉽게 물러갔지만, [[금나라]]가 멸망하고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몽골이 파병하는 군대의 규모가 증가하였고, 이 병력이 충주 이남으로 진격하면서 백성들은 진짜 지옥을 맛보게 된다. 그 와중에도 무신 정권과 그 사병 [[삼별초]]는 몽골군에 제대로 항거하지도 않았고 [[조운]]으로 세금만 걷을 뿐이었다. 각지에선 민중들을 중심으로 전장에 내몰린 힘없는 장수들과 [[승려]], 천민들이 합심하여 죽기 살기로 몽골군에 저항했다. 하지만 한편으론 토호를 주축으로 고려를 배반하고 몽골에 붙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특히 [[평양시|서경]](평양 - 동녕부) 주변과 동북면(쌍성 총관부)이 그렇게 넘어가면서 고려의 강역은 사실상 [[철령]], [[자비령]] 이남의 통일 신라 영역 정도로 내려앉았다. 무신 정변이 터진 이후 60년의 무신 정권도 그랬지만, 40년 가까운 대몽 항쟁 동안 고려라는 왕조 국가는 정말로 없는 거라 다름없었다 봐도 무방할 정도이고 고려 본토는 무정부 상태에 가까웠다. 결국 오랜 전란을 버티기 힘들게 되자 [[최항]] - [[최의]]를 거쳐 '''최씨 정권이 몰락'''했다. 1259년 고려는 [[원종(고려)|태자]]를 몽골로 보내 [[쿠빌라이 칸|쿠빌라이]]를 만나 강화(講和)를 논의했고, 이로써 여몽전쟁을 막을 내리게 된다. 태자가 몽골로 간 사이 [[고종(고려)|고종]]이 승하했고, 이에 태자는 귀국하여 왕위에 올랐다. 몽골과의 강화를 논의하고 온 [[원종(고려)|원종]]은 전쟁이 끝났기에 개경 환도를 시도했으나 최씨 정권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무신 집권자가 된 [[김준(고려)|김준]]과 이후 집권하게 되는 [[임연]], [[임유무]] 같은 무신 지도자들의 반대로 무산된다. 하지만 이들은 몽골과의 대립을 주장했던 자들로 끝이 좋지 못했으며, 1270년 임유무가 살해당함으로써 1세기 동안 이어진 '''무신 정권은 무너지게 된다.''' 무신 정권이 무너지자 개경 환도도 이뤄지게 됐다. 이후 일어난 [[삼별초의 난]]의 마지막 항쟁지였던 [[제주특별자치도|제주]]는 [[탐라]]총관부로 원에 넘어갔다가 돌아왔다. 삼별초는 자주 정신의 발로라는 측면도 분명하지만 무신 정권의 핵심이었던 친위 세력 최후의 발악에 가까웠다는 한계가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