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려/평가 (문단 편집) == 무장(武將)의 나라 == || [[파일:external/i61.tinypic.com/vsdowp.jpg|width=100%]] || || ※출처 : [[일러스트레이터]] [[http://blog.naver.com/dnjscjf1717|불나방님 블로그]] || 고려시대에는 걸출한 무인들이 많이 활약했다. 이는 고려가 전쟁을 통해 건국된 데다 존속 기간 내내 전쟁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가에서 군인의 수요가 컸고, [[조선시대]]에 비해 문관과 무관의 구분도 상대적으로 약했다.[* 고려의 명장들로 잘 알려져 있는 [[양규]]나 [[강감찬]], [[윤관]] 같은 무장들도 사실은 모두 문관 출신들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그 조선 또한 [[김종서(조선)|김종서]], [[송상현]] 그리고 [[권율]]이 모두 문관 출신들인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문관과 무관의 구별이 생각보다 엄격하지는 않았다.] 군대가 비대하다보니 [[격구]]나 [[수박(무술)|수박]]과 같은 무술들이 국가적으로 성행했다. [[정중부]]나 [[이의민]]도 무술 실력으로 왕의 눈에 들어 출세했다. 물론, 역으로 보자면 역사가 전쟁으로 점철되어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역사에는 무인과 영웅들의 활약만 기록되지만, 당대를 살아가던 민중들은 참으로 고생했을 것이다. 고려의 역사를 관통하는 전쟁만 꼽아도 엄청나게 많다. 건국기엔 후삼국 통일전쟁, 성종~현종대까지 이어진 거란과의 전쟁, 왕조의 최고 전성기인 현종 중기~인종 시기에는 여진 정벌, 인종 시기에는 1년 이싱 지속된 서경 반란(묘청의 난)이 있었다. 이후 고려의 암흑기였던 무신 정변의 발생부터 조위총의 난과 몽골의 침공, 말기엔 홍건적과 왜구의 약탈까지 내란과 외침이 멸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수백년간 평화가 지속되었던 조선과 대조적이다.[* 조선의 경우 건국 직후~양란 이전, 영정조 시절까지 약 300년 정도는 평화로웠다.] 고려의 무인들이 어떤 신분으로 구성되어 있었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수조지인 군인전을 기반으로 한 군반씨족설과 면세 혜택을 준 농민병들을 활용하는 부병제설로 나뉘었다. 이는 고려 시기 군제에 대한 소략한 기록이 두 가지에 모두 걸쳐있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경외군 혼성제설이라 하여 두 가지가 병존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 개국공신 [[유금필]]은 출동만 하면 지던 싸움도 역전시키는 용장이었다. * 고려 2대 국왕 [[혜종(고려)|혜종]]은 통일 전쟁기에 직접 활약한 무인이었다. 그는 호위 무사 없이 맨주먹으로 자객을 때려잡기도 했다. * 2차 여요전쟁 때 [[양규]]는 맹활약을 벌인 장군이었다. 그는 1천여 명의 병력으로 6천 명의 거란군이 지키는 곽주성을 탈환했다. 단, 이는 거란군의 규모가 과장되었거나 성 안에 고려 잔존 병력이 있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그럼에도 대단한 전공임에는 틀림없다. 이후 소수 병력으로 거란군을 끊임없이 기습하여 3만의 포로를 구출해냈다. * 3차 여요전쟁 당시 [[강감찬]]은 귀주에서 거란군 10만명을 휘하의 20만 고려군으로 대파하였다. 이는 훗날에 [[귀주 대첩]]이라 불리우게 된다. * [[문종(고려)|문종]] 때는 '유고'라는 절충군 대정이 활약했다. 그는 10명의 병사와 함께 저녁에 순찰을 돌다가 40여 명의 [[여진족]] 도적의 습격을 격퇴했다. 병사들은 놀라서 숨었지만 유고는 단기로 앞장서서 40여 인의 여진 도적들과 맞서 그들을 쫓아냈다. 이는 [[고려사절요]] 문종 3년(1049년) 6월에 기록되어 있다. * 여진전쟁 때 활약한 [[척준경]]은 한국사 최강의 무력을 지닌 맹장이었다. 그의 명성과 활약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 무신정권의 [[이의민]]과 [[두경승]]은 당대 최강의 무장들이었다. 둘 모두 [[수박(무술)|수박]]의 고수였다. 궁궐에서 주먹으로 벽을 쳐서 힘겨루기를 한 일화가 정사에 기록되어 있다. 특히 이의민은 [[의종(고려)|의종]]을 시해할 때 맨손으로 척추를 접는 방법을 썼다. 조위총을 토벌할 때는 눈에 화살을 맞았는데 그대로 적진으로 돌격해 적을 무찔렀다. * [[경대승]]은 무신정권기에 이름을 떨친 장수였다. 그는 약관(20세)에 고려 왕실 친위대 교위에 임명되고 26살에 기해정변으로 [[정중부]]를 죽이고 정권을 잡았다. 무엇보다 그가 집권할 때 다른 사람도 아닌 [[이의민]]이 그를 두려워해서 [[경주시|경주]]에 은거할 정도였다. * [[김경손]]은 [[귀주성 전투]]에서 12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몽골군 진영을 들쑤셔 놓았다. * [[승려]] [[김윤후]]는 [[몽골 제국/군사|몽골군]] 장군 [[살리타이]]를 활로 저격해 사살했다. 그런데 [[김윤후]]는 자신이 살리타이를 쏘지 않았고 그때 자신은 활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했다. 이는 만화 살례탑에서 그려진다. 물론 김윤후가 사살한 것이 맞지만 겸양의 뜻으로 한 말일 수도 있다. 이후 충주성 전투에서 노비군을 이끌고 70여일을 농성하여 몽골군의 맹공으로부터 성을 지켜냈다. * [[카다안의 침입|합단적이 침입할 때]]는 [[원충갑]]이라는 장군이 활약했다. 합단적은 강원도의 치악(지금의 원주)까지 내려왔다. 이때 합단적의 지휘관인 카다안은 원주에 도착해 노략질을 해서 전쟁 물자를 얻으려 했다. 그 중 기병 50명은 치악산을 순찰하면서 소와 말을 약탈하고 있는데, 원주 별초 향공진사 원충갑은 보병 6명으로 기병 50명을 무찌른 후, 말 8필을 도로 빼앗는 놀라운 전과를 거두었다. 또한, 원충갑은 치악성(원주성)에서 전투가 발발해 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해있을 때 7명의 궁병으로 기병 400명을 모두 죽였다. * 원충갑과 더불어 흥원창판관 조신이라는 장수도 활약했다. 기록에는 '단지 공을 세우려고 성 밖에 나가 적군 1명을 베었고, 화살이 그의 왼쪽 팔을 관통하였으나, 그는 북을 치며 성 밖에서 항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자 합단적은 사기가 떨어져 물러갔다고 한다. 이때 조신은 합단적의 장수인 도라도의 머리에 칼을 꽂아 그의 목을 장창에 꽂았다. 이에 적은 모두 도망쳤다고 한다. * [[충렬왕]] 때는 한희유라는 장군이 유명했다. 그는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에 참전했을 때는 맨손으로 적의 칼을 빼앗아 적을 베었다. [[카다안의 침입]] 때는 적군에 활을 잘 쏘는 적장이 있었는데 1장 8척(약 540cm)의 창을 휘두르며 적진에 돌입하여 적장을 죽였다. 그 후, 그는 장창에 적장의 목을 걸었다고 한다. 이에 적의 기가 꺾였다고 한다. 이 역시 전부 정사인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이 사람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http://gil092003.egloos.com/565427|여기]] 참고. * [[최영]]은 고려 말기 최고의 지휘관으로 꼽힌다. [[원나라]]의 요청으로 중원에서 반란을 진압할 때 적들의 창에 찔리면서도 전투를 속행하여 그대로 승리하였다. 고려에서는 홍산 전투에서 입술에 화살을 맞은 채로 싸워 승리했다. 고려를 침공한 [[왜구]]들이 "머리 하얀 최만호"라고 부르며 두려워했다는 기록도 있다. * [[태조(조선)|이성계]]는 [[신궁]]이자 한국사에서 손꼽히는 명장으로 유명했다. 여러 외적을 격퇴한 전적이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 이외에 [[원사(역사책)|원사]], 일본사에도 기록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제1차 요동정벌]]과 [[황산 대첩]]에서의 맹활약들이 특히 유명한 편이다. 그외 여러 기록에서는 이성계의 지휘 능력만이 아니라 활 솜씨도 매우 높게 평가하고 있다. 이를 보면, 다소 과장이 있다하더라도 활을 잘 쏘긴 어지간히 잘 쏜 모양이다. 심지어 본인 뿐만 아니라 본인의 후손들 중에서도 명궁이 많이 나왔다.[* 이 부분에서 가장 극단적인 경우가 [[정조(조선)|정조]]로 49발을 쏘아 49발 모두를 명중시킨 기록이 사서에 남아있다. 그러고는 하는 말이 "내가 한 발을 더 안 쏜 것은 모두 맞추지 않기 위함이다"라는 말까지 했을 정도였다. 이는 보통 임금이 활을 한번 쏘면 50발씩 쏘았는데 군주는 겸양의 미덕을 보여야 한다고 해서 보통 1발은 일부러 맞추지 않는게 관례여서 그런것이라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