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려/평가 (문단 편집) == [[고구려]] 계승 == >옛 [[신라]]가 [[황룡사|구층탑]]을 만들어 일통지업을 달성했으니, '''지금 [[개경]]에 칠층탑을, [[서경(고려)|서경]]에 [[중흥사|구층탑]]을 만들 것이다.''' >그 현공을 빌려 군추를 없애 [[삼한]](三韓)을 일가(一家)로 모으려 하니 경은 날 위해 소를 지어달라. >---- > - [[고려사]] [[최응]] 열전 중 발췌. >..."최근 서경(西京)을 세우는 것을 끝내고 백성(民)을 옮겨 그 곳을 채우니, 이는 지력(地力)을 빌려 삼한(三韓)을 평정하고 '''그 곳에 도읍하려 함이었다"'''... >---- > - 고려사 태조 세가 재위 15년([[925년]]) 5월 중 발췌. >[[이제현]]이 찬하여 말하길: "[[충선왕]]께서 늘 이르셨다: '...(생략)... [[태조(고려)|우리 태조]]께서 즉위하신 후, [[김부]]가 아직 방문하지 않고 [[견훤]]이 아직 잡히지 않았는데, 자주 [[평양시|서도]](西都)에 행차하시어 북방을 친히 순시하시니, '''그 뜻은 [[고구려|동명구양]](東明舊壤)[* 직역하면 '[[동명성왕]]의 옛 땅.' 고구려의 옛 영토를 의미한다.]을 오가청모(吾家靑氈)[* 직역하면 '우리 가문의 푸른색 비단 이불.' 즉 고려의 가보란 뜻이다.]로 여기시어 반드시 석권하시려 함이었다.''' [[신라|닭]]을 다루고 [[압록강|오리]]를 잡는데에 멈추려 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태조 즉위 설화 중 하나인 '왕창근의 거울'에서 인용한 것이다. 닭은 계림(鷄林), 즉 신라를 비유하고 오리는 압록(鴨綠), 즉 압록강을 의미한다.]...(생략)... >---- > - 고려사 태조 세가 논평 중 발췌. >'[[여진]]은 본래 [[고구려|구고려(勾高麗)]]의 부락으로, [[개마고원|개마산]] 동쪽에 모여 살았다. 세세토록 공물을 바치고 직위를 받으니, '''우리 조종의 은택을 깊이 입었다.'''' > >...(중략)... > >'이 땅은 본디 구고려(勾高麗)가 소유하고 있었다. 옛 비석의 글귀 또한 여전히 남아있다. '''그리하여 [[고구려|구고려]]가 전에 잃은 것을 [[예종(고려)|금상]]이 후에 얻으니, 어찌 천명이 아니겠는가?'''' >---- > - 고려사 윤관 열전 中. >(생략) [[태종(당)|태종(太宗)]]이 만국(萬國)을 신하로 만들어 천하를 지배하려하니 [[소정방|장군(將軍)]]에게 장수들을 통제하게 해 '''우리 고려(我高麗)를 침범했소. 장군은 불행히도 이겨 돌아가지 못하고 영원히 우리나라(我國)에 머무르게 되었으니''' (생략) >---- > -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전집 제38권 제소정방장군문 중 발췌.[* 소정방은 백제 - 나당연합군 전쟁에서 일정 성과를 끌어냈지만, 고(구)려 - 나당연합군 전쟁에선 대패하여 겨우 도망쳤다. 즉 제문과는 다르게 고구려에서 죽진 않은 셈.] 고려의 국가 정체성에서 [[고구려]] 계승 의식은 매우 중요했다. 국호부터 장수왕 이래 고구려의 국명이었던 고려를 그대로 이어서 썼고, 관찬 사서인 [[삼국사기]]의 본기에 [[고구려]]를 포함시켰으며, 잊혀질 뻔했던 [[동명성왕]]을 국조로 공인해[* 동명성왕의 사당은 서경(평양)의 [[장락궁]]에 위치했다.] 국가적 숭배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고려의 지배층은 민족적으로도 스스로가 고구려의 후손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신라와 달리, 고려는 '''왕건을 포함한 개국 세력부터가 고구려의 중심지였던 [[패서]]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고려 전기 지배층을 본관별로 분석하면, 통일 전 옛 고려 지역 출신이 성씨의 수에 있어서는 전체의 62%, 고급 관료의 수에 있어서는 75%를 차지하였다.] 하지만 고려의 계승의식은 꽤나 복합적이어서 삼국 중 단 하나만을 배타적으로 계승했다고 여긴 것은 아니었다. 일단 고려 중기에 편찬된 관찬사서인 [[삼국사기]]에서는, '''옛 삼국은 동등했고''', 그 중 신라가 삼국을 처음으로 통일하였으나 나중에 그 신라를 흡수한 고려가 진정한 정통 왕조라는 식의 관념이 드러난다. 삼국 역대 임금 모두를 '본기'에 넣었다는 점에서 그 부분은 분명해진다.[* 만약 고려왕조가 셋 중 어느 하나가 정통성에서 위라고 생각했다면 그 나라만 본기고 나머지는 세가나 열전에 넣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중국의 삼국시대를 다룬 [[정사 삼국지|삼국지]]가 바로 그렇고([[조위]]가 본기, [[촉한]]과 [[동오]]는 세가), 그 외에도 [[송서]] 문서의 내용과 같이 중국사에서 여러 나라가 존재한 시대를 다룰 때 누구는 본기에 넣냐 세가에 넣냐 하는 것은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와 관련해 곧잘 논쟁의 대상이 되었으며, 똑같이 [[기전체]] 역사서를 편찬하던 한국사 왕조들도 이런 개념을 잘 알고 있었다.] 즉 백제와 신라도 고구려와 동등한 위치에 둔 것이다. 이는 고려 초기에 비해 중후기에 이르러서는 삼한일통 의식이 고구려 계승 의식만큼이나 강성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고구려 계승의식과 삼한일통의식의 대립설에 대해 정작 고려 당대에는 그걸로 구체적인 파당이나 학파를 이루거나 했던 흔적은 전혀 없다.[* 고려사 윤관열전의 내용, 이규보의 동명왕편, 이색의 부벽루 등에서는 소위 고구려 계승의식이 흐려졌다고 여겨지는 고려 중기부터 후기에도 지식인들이 너무나도 당연히 고구려를 고려의 직계전조(前朝)로 여겼던 인식이 드러난다.] 즉 고구려 계승의식과 삼한일통의식은 모순없이 함께 계승되어 왔을 개연성이 큰데 그렇다면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 왕조가 중심이 되어 삼한일통에 성공해 삼국 모두를 계승하는 데까지도 성공했다는 식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일단 고려의 통일과정을 보면 태조 왕건은 경순왕에게 선양의 형식으로 왕위를 물려받은 게 아니라 [[태봉]]의 군주 [[궁예]]를 [[역성혁명]]으로 몰아내어 스스로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를 건국하고 국왕이 된 뒤 어디까지나 항복의 형식으로 신라라는 외국을 흡수하는 형식을 취했고[* 심지어 경순왕은 항복하기 4년 전 이미 고려에게 칭신했기 때문에 신라는 그 전부터도 고려의 신하국이었다.] 그런 이유로 경순왕은 고려 왕조에게는 정통성에 위협되는 존재로 취급되지 않았는지 이후 신라의 별칭에 해당하는 낙랑왕이라는 작위까지 받아 군왕(郡王)의 대우까지 받게 되는데 이는 '신라국'은 고려가 접수했지만 신라왕위는 그대로 보전해준 것이나 마찬가지로 고려 왕실이 '신라왕'이라는 자리를 계승하는 것에서 정통성을 찾았거나 탐냈다면 있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신라왕은 전통적으로 중국에게 낙랑군공/왕의 작위를 받았고(왜 하필 낙랑군이었는지에 대해선 [[낙랑군]] 항목 참조) 따라서 이는 신라군왕의 작위를 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에 비해 [[공양왕]]과 태조 이성계의 선양의 경우 '고려왕'을 선양받아 '고려국'도 같이 물려받은 형식이었으니 당연히 이성계는 선양을 받은 후에야 처음으로 국왕이 될 수 있었고 따라서 일단 고려왕이 된 뒤 새 왕조를 개창한다고 선포한 후에 고려왕을 잇는 '조선왕'이 된다. 이후 공양왕은 군왕 대우는커녕 존재 자체만으로도 조선 왕조의 정통성에 위협이 될 수 있었기에 [[오등작]]으로는 후작급인 공양군(君)으로 강등되어 박대당한 뒤 결국 피살된다. 일제강점기 조선 왕가의 경우도 나라는 뺏겼지만 왕가는 보전되어 [[이왕가]]라는 형식으로 존속되었는데 경순왕의 경우 고려에서 신라 왕가까지 보전해준 건 아니라 딱 자기까지만 왕 대우를 받았다는 차이가 있다. 여담으로 백제 멸망 후 [[당나라]]에 의해 태자 [[부여융]]은 명목상 백제를 잇는 [[웅진도독부]]의 도독으로 임명되면서 고구려의 요동군이나 신라의 낙랑군과 마찬가지로 백제의 별칭에 해당하는 대방군왕의 작위를 받았으며 이 작위는 부여융의 손자인 [[부여경]]까지 이어진다.][* 한편 후백제왕 견훤은 적어도 재위하고 있을 때는 태봉에게서든 고려에게서든 정통성 있는 백제왕으로 대우는 잘만 받았다. 이는 견훤이든 후백제든 그 존재 자체를 완전 부정한 신라의 경우와는 완전 다른 행보다. 물론 견훤이나 신검에 대한 사후 대우는 임금에 걸맞는 대우는 아니었다지만, 그렇잖아도 고려 왕조 외의 다른 임금들의 계보는 가급적 격하하거나 부정해야 하는 입장상 부정된 것이지 당대에도 후백제를 인정하지 않아서는 아니었다.] 이는 고려 왕조가 신라의 삼한일통을 계승하는 것에서 정통성을 찾았던 게 아닌 고려의 삼한일통만을 진정한 통합으로 보고 그 자체에서 정통성을 찾는 독자적인 관념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즉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하면서 시작하였고[* 일단 기본적으로 이게 없으면 고려는 작동이 불가능하진 않더라도 정통성이 크게 떨어지는 근본없는 반역왕조가 된다. 태봉이 미륵사상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정통성을 확립하려 시도했으나 실패했던 것에 비해 고려는 고구려에 대한 향수를 자극함으로써 수많은 호족들의 지지는 물론 옛 고구려의 영토를 잠식하는 것에 대한 큰 명분을 얻을 수 있었다.] 그 후에 후백제와 신라까지 모두 포섭하여 삼한일통에도 성공하였다는 식으로 보면 고구려 계승의식과 삼한일통의식은 서로 크게 모순될 게 없게 되는 것이다.[* 신라의 삼한일통의식도 이와 비슷한 형식이었다. 결국 삼국이 하나가 되기 위해선 삼국 중 어느 한 나라는 중심이 되어야 했고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정복하는 데 성공했으니 당연히 신라를 중심으로 삼한일통이 이루어졌다고 보았던 것이다. 다만 신라의 경우 물론 당대의 사서나 기록이 완전하게 남아있지 않기에 추정이긴 하지만 고구려나 백제에 대한 사서를 저술하지 않았다고 여겨지는 것으로 보아 오로지 신라만이 정통이라 보았을 가능성이 크다. 만약 신라측에서 삼국사를 저술했다고 해도 오로지 신라사만을 본기로 치고 나머지는 세가급으로 취급했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고려 왕조가 백제와 신라 또한 본기로 넣어 정통으로 대우해준 건 비록 고려인이 중심이 되어 통일왕조 성립이 이루어졌다고 해도 결코 백제인과 신라인을 소외시키거나 차별하진 않겠다는 강력한 포용의지의 표명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실제로도 고려 왕조는 다양한 출신의 호족들을 포용하는 데 성공했으니 괜히 고려 왕조가 고구려 계승 외의 삼한일통이란 업적에서도 강한 자부심을 가졌던 게 아니었던 것.[* 또한 이는 당대에는 그만큼 옛 삼국의 유민의식이 강력했다는 반증이었을 수도 있다. 삼국전쟁에서 두 번이나 패배한 백제까지도 엄연히 본기로 넣어야 했을 정도로 민심을 포용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이런 배경이 삼국 중에서도 고구려가 분명 좀 더 특별한 위치에 있게 된 이유였던 걸로 보인다. 관찬사서에서는 명목상 차등이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와중에도 고구려에 대한 배타적인 계승의식 또한 유지되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고려시대에 [[동명성왕]]은 백제나 신라의 시조와는 달리 고려의 시조로서 더 특별한 위치에 있을 수 있었다.[* 유명한 문인인 [[이규보]]도 시조로서의 동명성왕을 특별취급해 동명왕편을 썼던 사례가 있다. [[이색(고려)]] 또한 한시 [[부벽루]]에서 동명성왕을 소재로 사용했다. 수도 개경에도 [[유화부인]]의 사당이 있었고 평양이 고려의 제2수도인 서경이었던 배경상 고려인들에게 동명성왕은 유독 가깝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특정 한 나라에 치우치지 않고 삼국을 그나마 대등하게 계승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시대에 이르러서야 가능했는데 이는 조선이 삼국 중 하나가 아니라 [[고조선]]이라는 대과거에서 나라 이름을 가져오면서 삼국을 초월한 정체성을 선택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조선 왕조조차도 역대 한국계 왕조의 시조 및 주요 군주들을 모신 [[팔전]](八殿) 중 고구려와 백제에는 하나씩만 할당한 반면 신라에는 세 곳이나 할당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조선 대에는 삼국에 대한 균등한 계승의식을 보이지는 않았다는 견해도 있다.[* 사실 신라는 왕가가 [[박씨]], [[석씨]], [[김씨]]로 셋이나 되었기 때문에 조선의 기준으로 보면 각 가문당 사당 하나씩 세워야 격이 맞아서 그렇게 했던 측면도 있다. 조선 왕조는 모든 주요 역대 한국 왕조들에 대한 예우를 최대한 갖추려 했고 그랬기 때문에 삼국 외에도 평양에 [[고조선]]의 시조인 [[단군]], [[기자]]의 사당이 세워졌고 심지어 아무래도 위상이 비교적 낮았던 [[가야]]의 경우에도 김해에 [[수로왕]]의 사당이 세워졌다. 동명성왕의 사당이 따로 지어지지 않았고 단군의 사당인 숭령전에 같이 합사된 것으로 보아 소홀한 대우를 받았다는 견해도 있는데 고려 대에서부터 이미 단군=[[해모수]](《[[삼국유사]]》에서도 [[해부루]]가 단군의 장남, 동명성왕이 차남인 이복형제로 여겨졌다)로 여겨졌기 때문에 그러한 견해의 반영일 가능성도 있다. 같은 계통의 군주들은 예외없이 같은 사당에 모셔졌기 때문이고 기자는 따로 모셔졌다. 동명성왕을 소홀히 대우해 그냥 고조선 왕가에 합사시킨 거라면 순서에 따라 단군이 아닌 기자와 같이 배향되어야 했다. 그런데 기자보다 앞서는 단군과 같이 배향되었다는 점이 과연 단순히 소홀히 대우받은 것이라 볼 수 있는가?란 의심을 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어찌보면 고구려에 유리하게 해석한 것이고 어찌되었든 신라에는 성씨별로 3개의 사당을 마련했고 외국 왕족이면서도 신라 주요 귀족에 편입되어 신라사에서도 몹시 중요한 가야 [[금관국]] 왕실까지 포함하면 신라 관련해 최대 4개의 사당이나 마련한 반면(다만 신라에서 지대한 업적을 세운 김유신은 사당에 배향되지 않았으며 물론 김유신은 왕이 아닌 신하였으며 왕호를 얻은 것도 그저 추존왕에 불과했기에 배향될 수 없었다고 쳐도 신라에 항복했으므로 마찬가지로 신라에 대한 공헌을 했다고도 볼 수 있는 마지막 왕인 [[구형왕]]도 배향되지 않았다. 그에 비해 고려에 항복한 [[경순왕]]은 고려 왕조에서 높게 평가한 것이 반영돼 배향되었다. 수로왕의 경우 다른 가야의 왕들과 달리 조선시대까지도 지역에서 독자적으로도 상당히 신성시되던 분위기가 반영된 것도 커 보이며 따라서 금관국 왕실의 사당을 모신 게 단지 신라를 높이기 위해서였다고만으로 보기엔 힘들어 보인다. 구월산 삼성사의 경우도 환인과 환웅은 배제해야 한단 성리학자들의 주장이 거세 훼철 논란까지 있었으나 지역여론에 밀려서 결국 유지되었다) 고구려에는 하나의 사당, 그것마저도 단군을 주, 동명성왕은 부수적으로 모셨다는 점에서 삼한일통을 이루고 한국사 최초로 유교를 들여온 신라 왕조에 특별한 예우를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신라가 유교를 최초로 들여왔다는 건 잘못됐다. 선진유학은 고조선시대에도 이미 중국에서 발전해 있었고 정확히 시기를 알 수 없는 아주 오래 전부터 삼국 모두에 들어와 있었다. 고구려에서도 유교의 성인인 기자를 숭배했다는 게 기록되어 있고 관학으로서 유학을 중시해 태학과 경당에서는 시경, 서경, 역경, 춘추, 예기 등을 가르쳤고 이를 지도하는 오경박사가 있었다. 백제 역시 한성백제시대에 해당하는 4~5세기경의 [[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2003181704001?www#|인천 계양구 계양산성의 논어 목간이 발굴된 바 있다]]. 이는 한국 역사상 가장 이른 유교, 한학 유물이다. 이후로도 오경박사 [[왕인]], 아직기, 단양이, 고안무, 왕유귀 등을 일본에 파견해 천자문과 논어를 전하기도 했고 의자왕대 백제 왕족들의 인명에서도 유교적인 뜻을 담아 지은 흔적이 보인다. 오히려 불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신라는 고구려, 백제를 통해 가장 나중에 유교를 수입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삼국~남북국시대의 유교는 어디까지나 귀족들이 배우는 관학에 그쳤고 후대처럼 유교가 민간까지 확산된 건 고려시대에 들어서였다. 물론 아예 일반생활에도 침투하고 국교가 된 건 당연히 조선시대에 들어서야였다. 게다가 백제 온조왕의 사당은 [[인조]] 대에서나 온조왕사라는 이름으로 지어졌고 [[정조(조선)]] 대에 팔전으로 격상된 것으로 미루어보아 삼국 중에서도 비교적 소홀한 대우를 받았다. 고려 초기의 인식에서부터 이미 북부 지방을 대표하는 왕조로 여겨진 고구려에 대해 남부 지방을 대표하는 왕조의 자리는 신라가 차지한 데다가 온조왕부터가 단독으로 계보를 연 시조가 아닌 동명성왕의 아들로서 시작했으며 백제 자체로도 삼한통일을 해봤던 것도, 막대한 국력을 자랑했던 것도 아니었기에(그나마 백제의 위상이 가장 높았던 전성기도 삼국시대 초반이었기 때문에 고려나 조선 같은 후대에 가서는 이미 기억이 희미해질 수밖에 없었다) 위상이 떨어질 수밖에 없긴 했다. 심지어 백제인들부터가 공식 시조는 동명성왕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래도 나름 사당이 세워진 배경이 국난 극복의 역사와 관련이 깊었기 때문인지 독특하게도 조선 왕조의 신하와 함께 배향되어 뒤늦은 대우에 대한 만회를 약간이나마 한다.][* 사실 조선 왕조의 경우 마치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것처럼 적극적으로 삼국 중 하나를 계승했다기보단 유교적 정통론으로 정통관념이 일원화되었기 때문에 신라가 부각된 것에 가깝다. [[세종대왕]] 시기 정립된 역사관을 보면 단군-기자가 천명을 받아 고조선을 세웠으니 정통성의 시작이고 위만은 찬탈자였기에 정통에서 배제, 준왕이 남하한 마한에서 정통성이 이어지고 준왕의 계보가 단절된 후 삼국시대에는 무통시대라 하여 정통이 없었다가 고구려, 백제가 망하면서 단독 왕조가 된 신라로 끊어졌던 마한의 정통성이 이어지고 이게 고려를 거쳐 조선으로 이어졌다는 식의 관념이었다. 이는 유교적 정통론보단 고구려 왕조를 계승한 고려 왕조가 천명을 받아 태봉, 후백제, 신라 등을 모두 싸그리 정복하는 삼한일통의 과정을 통해 이전의 천명이 없어 그저 일시적으로 존속했을 뿐인 왕조들과는 달리 마침내 최초로 한반도의 진정한 주인이 되었다는 식의 독자적인 관념과는 차이가 나는 것이었다(즉 천명에 의한 한반도의 통합이 정통성의 근원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래서 조선 왕조에게 고조선 이후의 나머지 왕조들은 그냥 정통성이 넘어가는 과정에 불과했기에 오히려 기억도 안 날 정도로 가장 오래됐지만 정통성의 시초인 단군-기자를 가장 국가적으로 강조했고 조선이라는 국호를 가진 나라의 왕실을 감히 찬탈했던 위만의 경우 고려시대의 데면데면했던 인식에 비하면 거의 국적 수준으로 노이로제에 가깝게 멸시되었다. 그래서 조선 왕조에서 특별히 신라를 강조했다고 보기엔 신라의 문물이나 역사를 그다지 부각시키지도 않았고(신라의 국사였던 불국사는 조선 말기에는 폐허에 가깝게 방치되었다) 더 나아가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적 이상향을 목표로 삼았던 지배층인 유학자들에게 신라를 비롯한 삼국의 옛 왕조들과 바로 전 왕조인 고려 왕조는 적극적으로 본받아야 하는 대상이긴커녕 물론 한때 잘나갈 때도 있긴 했으나 결국에는 불교와 기이한 야만(중원 입장에서 보기에 이상했던 고대 한국의 고유 풍습)의 문화를 숭상해 신성한 유교적 질서를 제대로 실현하지 않고 무시하다 퇴폐적으로 망해버린 반성의 대상에 불과했다. 즉 일단 조선 왕조는 고조선을 기원으로 잡고 유교적 이상향을 목표로 삼음으로서 삼국의 정체성을 탈피하긴 했던 것이다. 문묘에 신라시대 인물 [[설총]]과 [[최치원]]을 배향했지만 여기에 고려 인물도 똑같이 2명을 배향했고 조선 유학자는 14명이나 넣을 정도로, 조선왕조가 신라 왕조를 다른 왕조들과 비슷하게 봤다면 몰라도 특별히 우대했다고 보긴 힘들다. 다만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은 조선 왕실에게 순순히 선양하지 않았고 적극적으로 저항했기 때문에 선양의 모양새가 매우 이상하게 되었고 이 부분은 면밀히 따지면 태조 이성계를 유교적 질서에 정면으로 반한 역적으로 만들 수 있었기 때문에 조선 왕조의 역린이자 컴플렉스가 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통일신라, 고려, 조선 모두 각자의 이유로 계승 인식 내 나라 간 차등을 두었고 가장 삼한 계승을 균등히 한 국가는 국호를 삼한을 계승한 대한으로 하고 교과서에서도 균등하게 분량을 배분하는 현대 대한민국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삼한 계승의 취지는 좋았으나 이후 사학과 고고학 등의 발전으로 현대인들에게 삼한의 실체가 광범위하게 알려지면서 삼한이란 명칭은 삼국 혹은 그 모두를 포괄한 한반도 전체보단 한반도 남부만 대표하는 이미지가 짙어지긴 했다. 당연히 이는 19세기 말 당대에는 예측하기 힘들었던 것이며 따라서 예상치 못하게 그렇게 된 것. 그래서 북한의 경우 억지 자존심 빼면 시체인 정부뿐만이 아니라 주민들 사이에서도 '한'은 남방색이 짙은 명칭이라고 보아 거부감을 느끼기도 한다. 물론 북한의 국호인 조선의 경우도 기원만 따지면 다분히 북방색이 더 강하다.] 참고로 단군의 경우 조선 대에 들어 단순히 한 국가의 시조나 성인이 아닌 한반도 전 역사의 시조이자 근원으로 떠받들어졌기에 삼국의 시조들과는 달리 전국적으로 숭배되기 시작해 원래 단군 신화와 관련이 깊었던 [[구월산]]의 [[삼성사]] 외에도 신화와 전혀 관련없는 남부 지방인 [[하동군]] [[청학동마을|청학동]]에도 [[삼성궁]]이 세워지고 [[환인]], [[환웅]]과 함께 모셔지는 등 격이 다른 엄청난 특별 대우를 받았으며 [[강화도]]의 [[참성단]] 또한 단군과 관련된 유적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이러니 저러니 해도 역시 팔전 중에서 가장 높은 대우를 받았던 건 조선의 직계 부모 국가라 할 수 있는 고려의 사당으로 고려 왕조의 사당인 숭의전에는 가장 많은 군주들이 배향되었다. >북원(北元) 요양성(遼陽省) 평장사(平章事) 유익(劉益)과 우승(右丞) 왕카라부카(王哈刺不花) 등이 명나라에 귀순하려 하였으나 그들은 명나라가 주민을 이주시킬까 근심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요양이 본시 우리 땅이었으므로 만약 우리 나라가 청하면 이주를 모면할 수가 있지나 않을까 하여 사신을 파견하여 통보하여 왔다. >---- > - 고려사의 공민왕 대 기록. 요동을 고토로 보던 당시 고려 조정의 인식은 물론 그걸 당대의 상식처럼 알고 있던 원나라 변방무장들의 인식을 엿볼 수 있다. 고려는 고구려의 국제적 지위와 영토를 계승하기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했다. 고려는 고구려의 고토였던 한반도 북부와 요동 일대에 대한 영유권을 꾸준히 주장했으며 이를 수복하기 위한 실제적인 노력도 끊임없이 병행되었다. 역사적으로, [[예종(고려)|예종]]의 여진 정벌이나 [[공민왕]]의 요동 정벌을 비롯해 내외적으로 어려운 여건에서도 수 차례나 [[제1차 요동정벌|북방원정]]이 추진되었다. 고려는 영토 수복에 대한 근거로 자국이 고구려의 후계국임을 대외적으로 강력히 주장했다. 요나라의 1차 침공에서는 이를 국제적으로 인정받기도 했다. 이런 고려의 노력 덕분에 고려는 당대에 국제적으로도 고구려의 적자로서 인정받았다. 고려의 주적이었던 [[요나라]]는 물론이고 고려와 긴장 관계에 있었던 [[금나라]]도 고려를 고구려의 후손으로 보았다. 이는 고려사 문종 세가 11년 3월조에 있는 [[요흥종]]의 고려 문종에 대한 책봉문을 보면 알 수 있다. 요나라는 국서에서 문종을 언급할 때 '주몽(朱蒙)의 후사', '일중유자(日中有子)[* 주몽의 후손이라는 의미]'라고 불렀으며, 고려 숙종을 언급할때 삼한(三韓), 오부(五部)[* 고구려의 5부]의 주인으로 불렸다 [[몽골 제국]]의 경우 그냥 고려를 고구려와 동일한 나라로 보았다. 몽골 제국의 [[쿠빌라이 칸]]이 고려가 항복 사절단을 보내왔을 때 [[당태종]]도 무너뜨리지 못한 나라를 자신이 굴복시켰다고 말하며 좋아했다는 기록이 있다. [[북송]]의 사신 서긍이 저술한 고려도경에서도 고려가 아예 고구려에서 그대로 이어진 나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고려도경에 따르면 수도 개경의 동신사(東神祠)라는 사당에선 [[유화부인]]에 대한 숭배가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현대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고려를 고구려의 계승국으로 보는 시각은 [[발해]]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적다. 이는 역사적으로 [[고구려]]와 [[고려]] 사이에 [[통일신라]]라는 또 다른 왕조가 존재했었고, 무엇보다 고려의 영토가 고구려에 비해 협소했기 때문이다. '만주를 정벌했던 강대국 고구려의 계승국이 소국인 고려일 수는 없을 것 같다'는 것이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의 입장인 것이다. 단순히 만주를 영유했다는 이유만으로 오히려 발해를 고구려의 정통 후신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으나, 이는 고구려 계승에 있어서 고려의 정통성과 역사적 성과를 엄청나게 폄하한 것이다. 또한 영토의 넓이와 별개로 영토의 질과 생산력은 중부와 삼남을 안정적으로 영유한 고려가 그렇지 못한 고구려를 압도했다는 중요한 사실이 잘 알려져 있지 않아 이런 오해가 생기기도 한다.[* 고구려가 고려에 비해 적은 인구와 생산력으로도 강력한 군사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건 지형의 덕이 컸다. 고구려는 요동을 완전히 점유하는 데 성공했고 그래서 요동의 복잡한 산지 및 험준한 늪지대인 요택을 이용해 유기적으로 연계된 강력한 산성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다. 게다가 예속되어 있던 말갈병을 통해 농경민만으로는 얻기 힘든 전문화된 기병전력을 활용할 수 있었다(이를 합쳐서 활용한 게 침략군을 수도 없이 괴롭힌 고구려 특유의 '산성기병'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고려보다 훨씬 적은 농경지와 인구의 백업만으로도 큰 성과를 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고려의 경우 압록강 라인을 방어선으로 점유하고 있었는데 압록강 하구의 요충지(옛 서안평이 있던 곳이다)가 뚫리면 그 다음은 평양에서 현 재령 일대까지 낮은 구릉지 및 평야지대만이 이어지기 때문에 이렇다 할 자연적 방어선이 없다(언젠가 천도할 것만 같이 여겨졌던 제2수도 서경이 전쟁 때마다 수도 없이 털리게 됐던 이유다). 그 다음은 황해도의 그다지 넓지 않은 산맥지대만 넘으면 지리적으로 완만한 서해안가를 따라 주요 도시들을 공략할 수 있게 된다. 이 지대는 결국 많은 인구를 채워넣어서 방어할 수밖에 없는데 고려가 아무리 삼국 그 어느 나라보다 인구가 많았다고 해도 대륙세력의 수많은 인구에 비해서는 항상 버거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인지 만약 고려가 요동까지 완전히 점유하는 데 성공했다면 과연 한반도 전체의 백업을 받을 요동방어선이 얼마나 강력해졌을지가 인터넷 일각에서 if 떡밥으로 종종 제시되곤 했다.] 게다가 영토적 유산으로 봐도, 그것을 고려는 발해 이상으로 잘 계승하고 있었다. 고려가 차지한 고구려의 고토는 고구려의 사회문화적 중심지였던 평양 일대와 패서 지역이었고, 그곳들을 차지한 고려는 발해에 비해 고구려의 알짜배기 지역들을 더 많이 차지한 셈이었다. 이는 고려가 고구려의 사회문화적 유산을 계승하고 국가적 정통성을 확보하는 데도 발해보다 훨씬 유리했음을 의미한다. 특히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을 영유했던 것은 고려 스스로도 고구려의 적통임을 주장하는 강력한 근거였다. 그래서 고려는 평양을 영유하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제2수도인 서경으로 삼아 화려하게 재건했다.[* 물론 고려 조정이 상시 위치하는 본수도는 개경이었으나 서경 역시 1년에 3달을 머무는 '또 다른 수도'의 위치이자 조정의 연장선이었고(원의 대도-상도 시스템과 비슷하다) 이는 '지방 부수도' 격이었던 동경, 남경과는 분명 차별화되는 위상이었다. 다만 '제 1 수도'인 개경과의 위상 차이 또한 명확하였고 [[묘청의 난]] 이후 서경은 더 이상 수도라 부를 수 없는 그저 그런 '지방 3경'으로 추락하였다. 사실 태조의 유조를 봐도 고려 왕조는 처음에는 아무래도 북진하여 요동까지 차지할 것을 염두에 두고 서경을 개발하였던 것 같다. 개경은 고려시대 내내 제기되었듯이 지리적으로 대도시에 적합하지 않은 반면 평양은 그것은 물론이고 요동까지 점유하게 되었을 때 한반도와 요동을 잇는 중심지의 역할을 가장 수월하게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진은 요나라, 금나라에 막혀서 실패했고 이에 서경은 위험한 최전선의 중심도시로 전락하고 만다. 심지어 몽골의 침략 때는 평양 일대가 아예 [[동녕총관부]]로 떨어져 나갔다가 겨우 반환되기도 했다. 이런 냉정한 현실 속에서 조선대에 들어서는 서경으로의 북천은커녕 오히려 남경(한성부)으로 남천하게 된다.] 이런 정통성과 강력한 계승의식은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국이라는 데 상당한 당위성을 더했다. 그래서 당대에 국제적으로 고구려의 적통으로서 훨씬 널리 인정받은 것도 발해가 아닌 고려였다.[* 그리고 어차피 고려의 건국 이후 발해가 곧 멸망해 고려가 태자 [[대광현]] 집단 같은 중요한 발해 유민 집단들을 상당히 흡수함으로써 사실 상관없게 되었다.] 발해를 고구려의 후신으로 보는 사람들은 지나치게 영토의 크기와 [[만주]]만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으며, 이는 고구려 멸망 이후 만주에 대한 상실감 때문에 지나치게 만주의 중요성만을 강조하는 것이 이유지만 그것은 적절하지 못한 견해다. 고구려의 중심지는 대중이 그렇게 좋아하는 만주가 아니라 한반도 북부 지역인 평양성 일대를 포함한 패서였다.[* 이 지역은 현재 [[북한]]의 사회문화적 중심지이기도 하다. [[장수왕]]의 천도에도 별다른 반발이 없었을 정도.] 요동 일대는 분명 군사적 방어선이자 농업 요충지였지만 고구려의 중심지는 아니었다.[* 심지어 요동은 농업 요충지로서도 부실했다. 바다 같은 완충지대 없이 대륙을 통해 시베리아 북풍이 그대로 들어와 겨울에는 영하 20도까지 떨어지는 지역이다. [[제1차 요동정벌]] 때도 [[요동성]]의 군량을 실수로 태워버린 뒤 따로 식량을 얻을 곳마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퇴각할 수밖에 없었고 동시대의 [[몽골]] 군벌이자 요동평야를 점유했던 [[나하추]] 또한 [[명나라]]와 적대하다가 교역이 끊기자 경제적으로 시달리다가 명군에게 결정타를 얻어맞자 못 버티고 항복한다. [[병자호란]]이 일어났던 주요한 원인 중 하나도 [[명나라]]와의 교역이 끊기자 [[청나라]]에 기근이 들 판이었기 때문이다.] 현대 한국에서 군사 지역인 강원도나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요충지라고는 해도 중심지라고는 부르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흥미롭게도 고려의 지정학적 조건도 신라보다는 고구려와 유사했다. 신라는 통일 전쟁 이후에는 대륙세력으로부터 유리되어 [[장보고]]의 [[청해진]] 등으로 대표되는 해양국가적 속성을 발전시켰다. 이는 당나라와 [[발해]] 같은 제국들이 이민족들로부터 통일신라의 완충지대가 되어주기도 했고 신라의 수도 금성([[서라벌]]) 또한 북방과는 먼 반면 한중일 삼국의 해로를 잇는 남해안과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는 신라와 달리 해양국가적 속성은 줄고[* 물론 삼면이 바다인 나라였던 만큼 오늘날 한국의 영문명인 코리아의 유래가 고려인 점이나 [[고려가요]] [[쌍화점]], [[벽란도]] 등을 볼 때 완전히 없어진 건 아니다. 하지만 일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교역 빈도수가 줄었고 중국 방면으로도 [[입당구법순례행기]]에 묘사된 것처럼 한국인들이 황해 바다의 무역로를 장악하는 정도는 아니어서 상대적으로 대륙 방면의 중요도가 높았다. 이는 기술의 발달에 따른 지정학적 변화로 인한 것이기도 했는데 남북국시대까지 일본은 중국과 직통으로 교역할 수 있는 항해기술이 없어서 반드시 한국을 경유해야 했고 그래서 신라를 거치거나 아니면 발해를 거친 뒤 육로로 교통해야 했다. 특히 발해를 경유하는 루트는 동해가 상당히 험했기 때문에 난파선이 속출할 정도라 쉬운 게 아니었고 그래서 그보다 무난한 교역로를 갖고 있던 신라가 경유지로서 많은 이득을 보았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들어서면 일본이 자국의 동부개척에 집중하면서 이전보다 교역량이 크게 줄어들게 되는 한편으로 그나마 있던 무역도 중국과 일본의 직통이 가능해져 한반도의 중계무역이 크게 축소되게 된다. 고려 말기에 들어서면 일개 호족들의 통제하에 있던 왜구가 요동이나 중국의 강남지방까지 약탈할 정도로 동아시아 전반의 항해기술이 크게 발달하게 되어 동남아시아에 중국, 일본인들의 거류지까지 생기게 된다. 삼국시대 초기에는 얕은 황해, 남해에서의 연안항해 정도만 가능해 백제-중국의 교통도 엄청난 일이었던 것에 비하면(항해술이 발달했던 백제도 고구려 장수왕에게 한성 일대를 털린 뒤 한동안 중국과의 교통이 어려워졌다가 이후 직항 루트를 겨우 개발하게 된다) 그야말로 대격변의 발전사이다.] 고구려처럼 대륙세력과의 역학관계가 부각되었다. 이는 발해의 멸망으로 고려가 거란, 여진, 몽골과 같은 북방의 강력한 기마민족들과 완충지대 없이 인접하게 되었고 고려의 중심 권역 역시 보다 대륙과 가까운 [[패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국의 중요한 해상 교류 국가였던 일본은 동시기에 고립을 선택하면서 덩달아 고려의 해양 교류 빈도도 크게 줄었다. 그로 인해 고려사는 해양세력과의 교류보다는 대륙세력과의 투쟁이 중심이 되었다. 고려는 신라와 백제 모두를 통합하여 삼한일통의 대업을 완수했는데, 이 영역들은 고구려가 가장 강성하던 시절에도 나제 동맹에 막혀 끝내 정복에 실패했던 영역들이었다. 고려는 통일신라에 대해 지방민들이 가졌던 두 가지의 불만에서 태어난 나라였다. 호족들의 자치권을 제한하고 중앙정치 참여를 부정한 점, 삼한일통의 대의를 표방했지만 그것이 실질적으로는 이루어지지 않고 명분 측면에서만 그친 점. 하지만 고려는 바로 그랬기에 역설적으로, 초기에는 전국에 통일신라처럼 체계적인 중앙집권체제를 관철할 수가 없었다. '''그런 짓을 했다간 전국의 호족들에게서 돌아올 강력한 비판은 '고려가 대체 신라와 다를 게 뭐냐?'일 게 뻔했기 때문.''' 그리고 실질적으로도 호족들의 군사력을 연합시켜 강력한 군사력을 구성하고 이를 통해 삼국을 정복할 수 있었건 것이었기 때문에[* 행정과 교통능력, 생산성이 떨어지던 시대에는 이처럼 준봉건제/군구적 제도를 통해 중앙집권을 다소 희생시키더라도 군사력을 최대한으로 끌어낸 경우가 세계사적으로도 흔했다. 현지에 익숙하고 애정을 가진 유력자들이 직접 통치하게 함으로써 상하로 똘똘 뭉친 조직력을 가지게 할 수 있었고 그 지역에 대한 전문화 또한 이끌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역으로 유럽 봉건영주들의 국왕에 대한 위협이나 당나라의 절도사 제도처럼 지방세력이 중앙권력에 도전하기 쉽게 하는 위험성 또한 안고 있었으나(연개소문도 쿠데타에 자기에게만 충성하는 동부의 병력을 동원해 중부의 국왕군을 공격했다 웅진성으로 도주한 의자왕이 잡힌 이유도 웅진성의 북방 병력이 국왕보다도 북방령이었던 예식진을 따랐기 때문이다) 전근대는 행정과 교통능력이 상당히 떨어졌고 일단은 군사력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게 급했기 때문에 군주들이 기본적으로는 분권제를 싫어했음에도 어쩔 수 없이 이런 제도가 자주 이용되곤 했다.][* 그렇다면 배타적인 중앙 위주의 제도를 가진 채로 한반도를 정복한 신라는 뭐였냐?는 의문이 있을 수도 있는데 그건 삼국전쟁에는 초강대국인 당나라가 개입해 왕가를 두 개나 몰락시키고 주요거점을 초토화하는 등의 전무후무한 위협을 가해 전체적으로 상당한 타격을 입었던 고구려, 백제계 호족들이 친연성은 없어도 유일하게 중앙권력 중심의 조직력을 완비하고 있던 신라에게 기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이 끝나고 전란의 상흔이 치유되면서 다시 세력을 회복한 고구려, 백제계 호족들의 정치적 불만이 대두될 때 다시 신라 왕조의 휘하로 들어가고자 한 호족들은 드물었다.] 호족들에 대한 물리적 탄압이 가장 극심했던 [[광종(고려)|광종]]마저도 호족들의 자치권을 모조리 회수해버리는 행태는 하지 못했을 정도였다. 물론 고려사 내내 계속 이런 건 아니었고 고려 중기에는 상당한 수준의 중앙집권화가 진전되면서 중앙귀족인 [[문벌귀족]] 중심의 시스템이 완성된다. 문벌귀족이 대거 몰락한 [[무신정변]] 이후로도 [[여몽전쟁]]기에 강도로 수도를 옮긴 상태에서도 조운제도가 계속 운영되고 지방관이 파견될 정도였다.[* 이 시기는 국왕의 권력이 다소 떨어져 왕실이 귀족들에게 압도적인 권위를 행사할 수 없었던 것이지 중앙정부 자체의 권력이 약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미 유력한 호족들의 중앙귀족화가 끝난 상태였기 때문에 중앙에 대항할 만한 지방은 특혜를 받은 제2수도였던 서경 정도뿐이었고 이마저도 [[묘청의 난]]으로 몰락하게 된다. 그래서 이후의 반란은 지방호족의 중앙에 대한 도전이 아닌 민란의 성격을 띠게 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고려 후기 [[몽골 제국]]의 지배로 왕실의 존속까지 위태로워질 정도로 제도가 흔들리면서 도로아미타불이 되고 다시 중앙집권제를 완비하게 된 것은 공민왕 시기부터였다.[* 고려의 중앙집권제를 분석할 때 초기의 호족연립정권적이었던 상황에만 국한해 후기신라보다 국토 통제가 못했다고 보는 시각에는 문제가 많다. 후기신라의 경우 그 수도의 위치에서 비롯되는 교통로의 특성 및 귀족연립정권적 특성, 외세의 개입으로 인해 왕가가 증발해버린 상황에서 세력을 온존한 호족들의 협력이란 배경 하에서 성립되었기 때문에 효율적인 관료제를 도입하고 국토의 중앙에 자리잡아 국토의 남북부 모두에 전반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한 후대의 고려, 조선와 비교하는 데는 시대적, 공간적으로 무리가 있다. 전반적으로 후기신라는 물산이 풍족하고 수도와 가까우며 특히 해상로의 거점이 되었던 백제의 영토 경영에는 적극적이었던 걸로 보이나(이것이 백제계 호족들의 영향력을 제약해 반발을 더 크게 불러일으킨 배경으로 추정된다) 북부 영토의 경우 상대적으로 훨씬 자율적인 형태의 준자치적인 통치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세계사적 관점에서 고구려-고려 관계와 가장 비슷한 관계로는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와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관계에 비유해볼 수 있다. 사산 왕조를 건국한 페르시아인들은 아케메네스 왕조 멸망 후 친척 민족이지만 국가정체성은 공유하지 않았던 파르니족의 [[파르티아]]에게 지배받았고, 아케메네스 왕조의 부흥을 기치로 건국 후 [[로마 제국]]이 지배하던 레반트 지역 및 발칸 반도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했다. 또한 마찬가지로 아케메네스 왕조의 발흥지인 파르스 지역에서 건국했다. 하지만 바로 그랬기에 거울상처럼 뒤집힌 공통점과 정반대의 차이도 발생했다. 사산 왕조 페르시아는 파르티아 기존 지배층을 두 측면에서 강력하게 비판했다. 후진적인 봉건제를 채택한 점, 그리고 페르시아와 무관한데 자격없이 옛 이란 지역을 지배한 점. 그래서 정국이 안정되자 캐치 프레이즈대로 중앙집권적 방향으로 국정을 운영했다. 결과만 놓고 보면 결국 고려가 사산 왕조 페르시아보다 우세했다. 사산 왕조는 그 최전성기에도 [[예멘]] 일대 외엔 그 영역 전체가 아케메네스 왕조가 다스리던 영역이었으나, 고려는 고구려가 정복에 실패했던 한반도 중남부를 모두 제패했다. 또한 사산 왕조는 끝내 [[이슬람 제국]]에게 버티지 못하고 망했지만, 고려는 비록 부마국이 되었을지언정 [[몽골 제국]]에게도 망하지 않고 국체를 지켜냈다. [[충선왕#s-2.3|덧붙여 그 지위를 이용해 몽골 제국의 황위 다툼에 개입했을 정도였다]]. 특이사항으로는 고려 왕조가 들어서고서부터 고분벽화에서 고구려 묘제의 고분벽화로 유명한 [[사신도]]가 다시 등장하기 시작한다. [[https://www.chf.or.kr/brd/board/741/L/menu/740?brdType=R&thisPage=1&bbIdx=111409&searchField=&searchText=|#]] 고구려의 고분벽화는 고구려가 낙랑군을 점령한 뒤 [[한나라]] 묘제의 영향을 받게 되면서 그려지게 됐는데 후에 독자적인 양식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는 한반도 남부에도 영향을 끼쳐 백제와 신라에서도 고구려처럼 고분벽화를 그리게 되었고 특히 백제의 경우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고분벽화에서 사신도가 등장하기도 했다.[* 다만 양식에서 중국 남북조시대 남조의 영향이 강하기 때문에 고구려의 영향이 아닌 남조의 영향을 받아 독자적으로 발전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https://www.koreascience.or.kr/article/JAKO201464750650417.pdf|#]]]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5776|#]] 신라에는 고분벽화에 사신도를 그려넣는 풍습이 없어 삼국통일 후 사신도는 자취를 감추었다가 고려가 들어서면서 다시 등장하게 되는데 이는 조선시대에도 이어져 다양한 작품이나 장식물에 사용되었고 [[선조(조선)]]의 왕릉인 목릉(穆陵)의 고분벽화에 그려지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