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려/평가 (문단 편집) == 단일 국가관 정착 == 고려는 한민족으로서의 의식적인 통합을 이루고 단일한 국가관을 정착시켰다. 현재 [[대한민국]]과 [[북한]]까지 이어지는 한민족이라는 의식은 이때부터 시작했다. 그러므로 [[한국사]]에서 고려의 통일이 지니는 의의는 매우 높다. 고려 이전 [[신라]]의 [[삼국통일]]의 결과는 [[남북국시대]]가 되었으며, 그나마도 신라 내의 고구려, 백제 유민들의 의식까지 통합해내진 못했다. 신라 조정은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들을 흡수하기는 했으나 그들을 '신라인'으로 만드는 데는 소홀했다. 물론 신라가 유독 고구려, 백제 유민들을 특별히 박해했던 건 아니었는데 나름대로 [[삼한일통]] 사상을 주입하기도 했고, 지방민 차별이라는 것도 통일 이전 기존 신라인들에게도 적용되었던 골품제를 비롯한 여러 신분제와 차등 대우들을 백제와 고구려 유민들에게도 그대로 적용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이는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들에게 기존 신라인들보다 더 큰 박탈감을 주었다. 이런 박탈감 때문에 신라가 쇠약해질 때까지 200여 년의 시간이 지날 동안 통일신라 백성들의 통합된 국가관이 생성되지 못했고, 결국 시간이 지나 신라 정부의 통치력이 약해지자 신라는 [[후삼국시대|후삼국]]으로 분열되었다. 이는, 중국 최초 통일왕조 [[진(통일왕조)|진나라]]가 통일 후 겪은 부작용 및 재분열 이유와 비슷했다. 진나라 역시 통일 이전 전국시대 진나라 때부터 늘 하던 대로 통일 후에도 전국에 엄격한 법가적 통치를 적용했던 거였으나, 원 진나라 영토의 백성들과 달리 통일로 새로 얻은 나머지 6국 지역에서는 자신들의 전통과 맞지 않는 법가적 통치에 반발심이 있었고 진나라는 이에 대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진나라의 법치든 신라의 골품제든 기존의 사회 제도 내에서 나름의 기득권을 축적해 온 기존의 신라인/진나라인들에 비해 피정복민으로써 새로 이 사회에 편입된 백제인/고구려인 및 육국인들에게는 그 제도를 '''그대로''' 적용한 것 자체가 일종의 차별로 작용했던 것이다. 정복국 입장에서는 새로 편입한 영토와 백성들을 통제하기 위해 당연히 요충지에 지방관을 파견해야 하고, 당장 직전까지 전쟁하던 피정복국 귀족들에게는 반란의 위험성 때문에 보좌나 바지사장이나 낮은 자리 정도면 모를까 요직을 주진 않는다. 그렇다 해도 귀족 대우를 거진 박탈하는 지경까진 잘 가지 않는다. 전후에 인구 증가 및 개발로 인해 증설되는 지방행정단위에 기존 기득권층인 중앙귀족만 쑤셔박으면, 기존 백제, 고구려 지배층의 유민일 수밖에 없는 호족들은 아예 그냥 국정 자체에 참여하지 말란 얘기밖엔 안 된다. '''고려가 통일하면서 새로운 기득권층이 된 패서호족들은 어디 신라 진골처럼 하고 싶은 유혹이 없었겠는가? 그렇게 하면 지방반란으로 인한 망국 외엔 길이 없는 걸 아니까 못했던 거였다.''' 이런 식으로 피지배국의 옛 유력자 출신들의 역량이 전후복구 등으로 인해 성장하는 것에 비해 차별이 존재해 파이는 모자란 상황에서 기후 등의 문제로 기근이라도 들어 [[맬서스 트랩]]에 걸린다면 그야말로 불안한 정국이 발생하기 위한 최적의 조건이 완성되는데, 결국 그걸 고치거나 방지하는 걸 끝끝내 막아버린 것에서 신라 진골층의 어리석음은 변명할 길이 없다. 이는 단순한 어리석음이 아니라 그만큼 신라 귀족 집단이 피지배층은 물론이고 타 삼국의 지배층들에 대한 동질감마저도 낮았을 만큼 배타적인 집단이었기 때문에 발생한 현상이다. 신라는 삼국시대 삼국 중에서도 유독 지배층의 배타성이 짙을 수밖에 없는 역사적 상황에 있었다. 물론 신라 왕실도 그걸 모르지 않았기에 나름대로 안전장치를 마련했지만[* 근위대에서 진골, 6두품 등 수도 귀족 집단 완전 배제, 조령 및 추풍령 지방 출신 우대 등], 혜공왕이 피살된 후에 이 아슬아슬한 균형은 심지어 6두품까지 배제하게 된 진골의 독점으로 급격히 추가 기울게 된다. 그래도 무열왕계가 왕위를 계승하던 신라 중대에는 [[경덕왕]]의 사례처럼 구 백제 지역을 특별히 신경썼지만, 무열왕계가 어째서 그렇게도 옛 백제 지역을 신경쓰고 나름 우대했는지 그 문제의식을 이해하지 못한 원성왕계는 직접 지배 제체가 그래도 잘 돌아가는 옛 백제 지역에는 거의 잘 신경쓰지 않은 것 같고, 엉뚱하게도 정작 신라 왕실에게 별 악감정은 없었던 [[패서]] 지역에 의혹을 품고 경계했다.[* 이는 당시 성장한 패서지역의 역량을 경계했기 때문이었던 걸 수도 있다. 신라 후기 한반도 남부는 기후변동으로 재해에 시달렸지만 패서지역은 오히려 평화시대에 발달한 농업과 무역으로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삼국사기를 통해 본 한국 고대의 자연재해와 가뭄주기(윤순옥, 황상일)] 또한 그전 눌지계 신라 왕실과 습보계(=무열왕계) 신라 왕실은 대백제전, 대고구려전, 나당전쟁에서의 잦은, 그리고 궁극적인 승리로 얻은 큰 권위를 통해 진골들을 다소 강압적으로 다루면서 필요한 개혁은 어떻게든 하거나 해보려 했던 반면, 아무래도 그런 권위는 없었던 원성왕계는 진골들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어 급진적 개혁은 불가한 상태였고, 그 결과는 모두가 아는 바이다. 반면 고려는 고구려의 후계국임을 자처하면서 [[발해]]의 유민들도 흡수하는 데 성공했으며, 신라의 삼한일통 의식도 이어받았고, 그에 따라 고려시대에는 신화와 역사의식의 개변이 이루어졌다.[* 관찬사서인 삼국사기가 신라만 본기, 나머지는 세가의 형식이 아닌 모두 본기인 형식을 취한 것으로 보아 일단 삼국 모두 정통인데 고려는 고구려를 이어받았으니 북부의 정통성을 이미 갖고 있었고 신라는 백제를 흡수했으니 남쪽의 정통성을 갖고 있었는데 고려가 신라를 흡수함으로써 모든 정통성을 갖게 되어 진정한 삼한일통을 이루었다고 여긴 듯 하다.] [[패서]] 지역 기반 성인인 [[단군]], [[기자(중국)|기자]], [[동명성왕]][* 다만 동명성왕은 삼국 중 고구려 하나만을 대표할 수 있는 인물이란 성격이 너무 강해 전국의 공감을 얻기 힘들었고 그에 따라 시대가 지나면서 공동 시조격 인물에서는 내려오고,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여러 시조들 중 한 명 정도의 대우를 받게 되었다. 그래도 이런 과정을 거쳐봤기에, 또한 신화의 내용도 가장 극적이기에 현대에 와서도 시조급은 아니더라도 삼국의 시조들 중 가장 중시조급에 가까운 독특한 위상을 갖게 되었다. 고려시대에도 이미 유일하게 단군과 혈연이 있는(아들) 삼국의 시조로 취급되기도 했다. 물론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의 경우는 결국 동명성왕의 2세이기에 위상이 밀릴 수밖에 없긴 하지만... 심지어 이 경우는 본국인 백제에서마저도 명목상 시조는 동명성왕으로 여겼다.]은 삼국 이전부터 한민족의 시조였던 것으로 격상되었다.[* 신라의 시조급인 [[혁거세 거서간]]이나 김씨 왕가의 시조급인 [[김알지]]/[[성한왕]]은 통일신라 정도를 제외하면 이렇게 한민족 전체의 시조급으로 숭상되었던 흔적이 없다. 특히 신라의 시조의식이 실전되었다는 게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이 김알지/성한왕에 대한 부분인데 성한왕은 기록이 남지 않아 금석문을 통해서만 존재가 드러났으며 지금도 당대 신라 왕실에서 이들의 관계에 대해 정확히 어떤 입장을 갖고 있었는지에 대한 기록이나 정설이 없다.] 단군과 기자[* 현대 사학계에서는 [[기자조선]]설의 실체를 부정하고 있지만, [[고고학]]이고 뭐고 없었던 고려-조선 당시의 관점에서는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이다.]가 통치한 [[고조선]]은 삼한에 건립된 최초의 국가이자 시조국으로 공인되었고,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성왕]]은 부벽루, 동명왕편 등 고려시대의 각종 문학 작품에 등장하였다. 이런 의식 개변 덕분에 마침내 한민족들이 '''단일 공동체'''의 개념을 형성할 수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