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려/왕실 (문단 편집) === [[태조(고려)|태조]] === 태조 왕건은 부인이 많기로 유명하다.[* 고려를 떠나 한국사 전체의 왕으로서도 가장 확실히 기록된 사례다. 자식의 경우 총 34명(25남 9녀)로 기록.]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태조가 많은 부인을 가졌다는 사실 정도는 알 정도.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즉위 초 불안한 왕권과 낮은 정통성을 보완하기 위해 유력 귀족들과 혼인을 통해 혈맹을 맺는 혼인정책을 펼쳤다. 사서 등 알려진 바에 따르면, 29명[* [[동국통감]]에만 나오는 대량원부인은 일반적으로 [[신성왕태후]]가 왕태후가 되기 전 호칭으로 알려져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왕건에게는 25비주(妃主)가 있다고 하여 고려사의 기록과 차이가 있다. 다만 고려에서는 조선과 달리 후궁을 비(妃)로 칭했으므로 후궁 23명에 훗날 왕태후로 승격된 [[신정왕태후|명복궁대부인]], [[신성왕태후|대량원부인]]을 추가하면 정확히 25명이 된다.]의 부인을 두고 있고 부인들 모두는 유력 지방 호족이거나 공신들의 딸이다.[* 태조는 이들에게 [[고려의 궁원]]을 봉해주었다.] 이 혼인 정책은 태조가 살아있을 때는 그들의 딸을 인질로 삼아 반역을 억제하는 기능을 하였지만, 사후에는 유력 귀족을 외가로 둔 쟁쟁한 왕자들 덕분에 왕위 쟁탈전의 계기를 제공하였다. 분량 문제로 인해 왕후[* 신혜, 장화, 정덕] · 태후로 승격된 원주[* 신명, 신정, 신성], 특정 시호를 받은 원주[* 헌목, 정목, 숙목, 예화, 성무], 그 외 기타 원주, 이외 기록에서 발견되는 자식들로 나눠 서술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