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려 (문단 편집) === 지방 행정 === >'''사방 경계를 보면, 서북은 [[당나라|당(唐)나라]] 이래로 [[압록강|압록]]을 한계로 삼았고 동북은 [[동북9성|선춘령]]을 경계로 삼았다. 서북은 그 이르는곳이 [[고구려]]에 미치지 못했으나 동북은 그것을 넘어선 것이다.'''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672844&categoryId=49630&cid=49617|『고려사』 권56, 지제10, 지리(地理)1 서문]]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고려의 12목 위치 이미지.png|width=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고려 행정구역.svg|width=70%]]}}} || ||<-2> {{{#000000,#ddd [[10세기]] 고려 12군의 위치(좌), [[11세기]] 고려의 행정구역(우) 출처는 『대한민국 국가 지도집』, 국토지리정보원.}}} || 고려의 지방 행정 구역은 최초에는 8목이었으며, [[성종(고려)|성종]] (995년) 때는 [[당나라]]를 모방한 [[10도]] 12군 체제였다. 10도는 관내도(關內道, 개경의 수도권), 중원도(中原道), 하남도(河南道), 강남도(江南道), 영남도(嶺南道), 영동도(嶺東道), 산남도(山南道), 해양도(海陽道), 삭방도(朔方道), 패서도(浿西道)였다. 한편 12군은 8목에서 늘린 12목에서 명칭을 바꾼 것으로, [[양주시|양주]](楊州)·[[광주시|광주]](廣州)·[[충주시|충주]](忠州)·[[청주시|청주]](淸州)·[[공주시|공주]](公州)·[[진주시|진주]](晋州)·[[상주시|상주]](尙州)·[[전주시|전주]](全州)·[[나주시|나주]](羅州)·[[순천시|승주]](昇州. 훗날의 [[순천시]])·[[해주시|해주]](海州)·[[황주군|황주]](黃州)로써 이 도시들은 조선 시대까지도 지방의 중심 도시 역할을 수행했다. 조선 [[태종(조선)|태종]] 때 행정 구역을 개편하면서 원래 주요도시를 의미하는 州가 붙은 도시들이 필요 이상으로 많다는 이유로 덜 중요하다고 판단한 지역들의 州자를 山 또는 川으로 변경했는데, 이 도시들은 대부분 州 호칭을 유지한 것도 알 수 있다. 또한 도읍 [[개경]]에 고려가 계승한 고구려의 도읍 [[서경(고려)|서경]]([[평양성]])에 더해 신라의 도읍 [[서라벌]]이었던 [[경주시]]를 [[동경(고려)|동경]]으로 삼아(성종 6년) 삼경을 이루었다. [[문종(고려)|문종]]대에는 [[서울/강북|서울 강북]] 역시 [[남경(고려)|남경]]으로 승격해 삼경의 한 축을 이루었다. 다만 서경의 지위는 동경, 남경과 같은 일반적인 '지방 3경'이 아닌 개경에 버금가는 '제2의 수도', 혹은 '또 다른 수도'였다. [[원나라]]의 대도-상도의 이중 수도 시스템에 비슷했다. 서경의 수도로서의 확고한 지위는 [[훈요십조]], 분사제도, [[서희]]의 발언, [[서경별곡]]의 가사 등 여러 방면에서 드러난다. 다만 그럼에도 개경보다 왕이 머무는 기간이 짧았고 주요 정쟁도 개경에서 벌어졌으며 [[고려왕릉]] 한 기도 평양 근교에 없기 때문에 '제1의 수도' 개경의 지위가 조금 더 높았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러한 개경에 비한 은근한 차별의 결과가 바로 그 유명한 [[묘청의 난]]. 하지만 1136년 [[묘청의 난]] 이후 서경은 그저 그런 '지방 3경'의 지위로 격하된다. 이 역시 다르게 생각해보면 동경, 남경보다 여전히 우월한 서경의 위상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동경을 예로 들면 반란이 날 경우 일시적으로 일반 군현으로 나가떨어졌지만 서경은 같은 상황에도 3경 미만으로 격하당한 적이 없다. 묘청의 난 당시에도 따지고 보면 개경의 조정(중앙정부)에게 대놓고 반기를 드러낸 사건임에도 개경과 서경의 지위 사이에 선을 보다 확실하게 긋는 수준에 그쳤지 서경을 3경 미만의 지방 도시로 전락시키지는 않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후 [[현종(고려)|현종]] 때는 [[5도 양계]] 및 [[경기]] 체제로 변경되었으며 5도는 경상, 전라, 양광[* [[양주시]], [[광주시]]. 오늘날의 [[경기도]], [[충청도]].], 교주[* 오늘날의 [[강원도]] 영서.], 서해[* 오늘날의 [[황해도]].]이며 양계는 북계[* 오늘날의 [[평안도]].]와 동계[* 오늘날의 [[강원도]] 영동과 [[함경남도]].]였다. 경기는 수도 [[개경]] 주변을 일컬었다. 정확히 말해 경기'도'가 아니다. 이 당시 고려는 경기를 도와 별개의 지역으로 설정했다. 비슷하게 과거 [[일본]]의 행정 구역도 기(畿)와 도를 구분해서 크게 5기 7도의 행정 구역([[홋카이도]]가 추가된 뒤 5기 8도.)으로 나누었다.. 고려에서 경기 지역은 오늘날의 개성, 개풍, 장단, 연백 일대였다. 고려 말에는 경기가 더욱 확장되어, 현재의 [[황해도]](북한이 설정한 행정 구역으로는 [[황해북도]]) 일대 및 [[경기도]]의 한강 이북 지역이 편입된다. 서경([[평양]])과 그 인근 지역에는 서경기를 설치해 수도로서의 서경을 존중하였지만 [[묘청의 난]] 진압 후 서경이 이전에 비해 푸대접을 받게 되면서 폐지됐다. [[문종(고려)|문종]] 21년에는 삼경에 더해 양주의 일부에 [[남경(고려)|남경]](지금의 [[서울/강북|서울 강북]])을 설치했다. 당시 동경이라 불렸던 경주는 몇 차례의 반란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일반 군현으로 격하된 적이 있었으나 고려가 황제국 지위를 유지하는 동안 전체적으로 동경의 위상을 유지하였다. 그렇지만 남경으로 지정되었다 하더라도 후에 [[조선]] 왕조에 의해 '''왕도(王都)로 승격'''되고 [[대한민국]]의 수도로 있는 [[서울특별시|서울]]은 이때까지는 어디까지나 [[개성시|개경]]과 [[서경(고려)|서경]]에 비해서 크게 밀리는 편이었다. 물론 단순한 지방 도시는 아닌 삼경 중 하나인 남경이었지만 지금과 같은 그런 큰 지위를 가지지 않은 곳이었다. 이런 곳이 후에 조선 왕조에 들어서 '''왕도로 지정되어서 이후 대한민국이 되는 오늘날까지도 수도로서 기능하는 600년 전통의 대도시'''가 될 줄은 이때까지만 했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지정학적으로 보면 어느 정도 예측되는 부분이기도 한데 일단 수도 개경은 인구가 늘어나면서 대도시로서는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내내 천도론이 제기되어 왔다. 그래서 큰 강을 끼고 있는데다 평야지대에 있어 대도시로서의 입지조건에 적합한 서경으로의 천도가 우선 제기되었으나 고구려 때와는 달리 요동반도를 차지하는 데 실패해 서경의 안보를 보장해 줄 적당한 완충지대를 가질 수 없었다(만약 기병부대가 의주쪽의 저지대만 통과하는 데 성공한다면 이후는 거의 평야지대이기 때문에 서경까지 빠르게 진격할 수 있었다. 이걸 병력을 때려박아 틀어막기에는 또 항상 대륙세력보다 고려의 인구가 훨씬 적었다). 결국 그 다음 후보로 국토의 거의 중앙에 위치하며 또한 큰 강을 끼고 있는 입지의 대도시였던 남경이 주목받기 시작했는데 고려 후기의 혼란통에 천도론은 흐지부지되었다가 조선 왕조가 들어서고 나서야 천도를 감행하게 된다. 이후 남경의 입지는 매우 적합했기 때문에 조선시대 내내 천도론은 거의 제기되지 않았다.] 특히 고려의 3경은 서경, 동경, 남경이 각각 고구려, 신라, 백제의 고도에 위치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애초에 서경은 태조대에 고구려 계승 의식 차원 및 입지가 매우 우수해 집중적으로 육성시켰기에, 그리고 동경은 성종대에 서경 세력 견제와 신라의 고도에 대한 예우 및 경상도에서 손꼽히는 대도시였기에 지정된 것이다. 문종대 남경 설치의 경우 사실 백제의 고도에 대한 예우 차원보다는 풍수지리 및 대도시가 들어서기 좋은 입지라는 이유가 더 크기는 했으나 [[http://db.history.go.kr/KOREA/item/level.do?itemId=kr&bookId=%E5%BF%97&types=r#detail/kr_056r_0010_0030_0020|<고려사 지리지> 내 양광도 남경유수관에 대한 설명]]에서 볼 수 있듯이 남경이 백제의 고도 한성에 위치하였다는 인식 또한 당대 고려인들에게 분명히 존재했다. 비록 설치 시기는 상이하지만 이렇게 고려 왕조가 의도적으로 삼국의 고도에 3경을 설치했다는 사실에서 고려의 삼한일통 의식이 엿보인다. 추가적으로 흥미로운 점이 있다면 고려가 삼경 중에서 특별히 서경을 우대했다. 서경의 경우 반란에도 강등당하지 않았고 1308년 동경과 남경이 강등당했을 때도 서경만은 강등을 면하였다. 하지만 [[묘청의 난]] 이후 개경-서경 사이에는 또 명확한 선을 그었다는 사실이 고려가 [[삼한일통]] 의식을 내세워 삼국을 모두 계승하였지만 그 중에서도 고구려를 더 특별 취급을 해주었고, 그럼에도 본인들은 또한 삼한일통에 기반한 초월적인 정체성을 내세우며 이전의 고구려와 또 미묘하게 차별화를 시도했다는 점과 묘하게 맞아 떨어진다는 점이다. 사실 애초에 고려 왕실이 노린 바일 수도 있다. 고려는 고구려의 장수왕 이후 국명 '고려'를 그대로 따왔지만 정작 본인들이 [[삼국사기]]를 저술할 때에는 고구려를 고려라 하지 않고 장수왕 이전의 국명인 고구려로 명명해 본인들과 또 미세한 선을 그었다. 게다가 삼국 중 신라본기가 가장 앞에 온다는 점은 덤.[* 사실 이건 당시 전해지던 건국연대상 신라가 가장 이르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애초에 고려 왕실이 노린 바일 수도 있다. 5도는 그 아래에 주현과 속현이 있었는데, 주현은 규모가 큰 도시에 지방관이 파견된 고을을 말하고, 속현은 그 주현의 지휘를 받는 지방관이 없는 고을을 가리킨다. 고려 시대는 주현보다는 속현이 많았다. 심지어 [[조선]] 초까지도 속현이 존재했다. 지방에 외사정을 파견한 [[신라]]보다 중앙 집권 체제가 철저하지 못했다. 고려의 태생 자체가 호족들이 연합해서 세워졌기 때문이다. 다만 그렇다고 신라가 고려보다 엄청나게 중앙 집권 체제가 강했던 건 아니었고 한국사에서 중앙 집권 체제가 철저하게 이루어졌던 나라는 오로지 조선뿐이었다. 그 이전 국가들은 시대적, 지리적 한계상 재지 세력들을 철저하게 통제하는 것 자체가 힘들어 연맹왕국 단계를 넘어서도 봉건제적 요소가 꽤 남아있었다. 한반도는 산지가 70%를 넘는 지형이라 지리적 구분이 상당히 공고했다. 괜히 삼국이 수백 년을 싸워도 당나라가 개입하기 전까진 결판이 안 났고 그 와중에 가야, 마한의 소국들이 한반도 남부에서 오랜 시간 동안 잔존할 수 있었던 게 아니다. 이건 철저한 관료제를 통해 중앙 집권 체제의 선두국이었던 중국을 제외한 전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이 골머리를 앓았던 문제였기 때문에 이상할 건 없다. 물론 그 중국 또한 각 왕조의 말기에 가면 통제를 잃고 지방에서 반란 터지고 난리 나는 건 똑같았다. 조선의 경우도 몽골군의 침략과 고려말의 대혼란으로 한반도 지방 세력들의 사회 공동체가 와해되고 기반이 완전히 박살난 뒤였기에 중앙 집권 체제가 수월하게 자리잡을 수 있었다. 조선을 세운 전주 이씨 왕가도 원래는 전주 지역의 호족 가문이었으나 몽골군의 침략으로 전 국토가 박살이 난 뒤에는 강원도로 이주했다가 함경도 끝단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오는 등 광범위한 이동성을 보인다. 고려 초중기 때만 해도 본관은 폼이 아니라 그 자체로 연고, 신분, 세력 등을 드러내는 등 지역과 가문이 극도로 밀착된 모습을 보여줬는데 몽골군에 의해 대혼란이 찾아온 뒤로는 그러한 개념은 무너져 버린다.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교체기에, 할거하거나 독자정체성을 주창하며 일어난 지방세력이 전혀 없이, 쉽게 말해 후삼국시대가 재현되지 않았던 점도 이와 연관이 깊다고 보인다. 도 아래에는 군, 현이 주를 이루었으나 특수 행정 구역인 향, 소, 부곡도 있었다. 이것들은 주로 천민들이 거주하는 지역이었는데 종류에 따라 수공업과 농업 기능을 가졌다고 2011년 기준으로 2년 ~ 3년 전까지의 국사 교과서에서 말해 왔다. 하지만 전부터 향, 소, 부곡민에 대해선 논쟁의 대상이었다. 학계에서는 이미 1960년대 이래 향, 소, 부곡민이 양민이었다는 설이 나오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향, 소, 부곡이 천민이 아니라 '신량역천', 즉 천민의 일을 하던 양인들이 살던 곳이라고 하는 주장이 나온다. 이것은 양인에 대한 해석에서 나온 것인데 양인은 국역을 지고 독립된 가호로서 존재하여 개인에 종속되어 국역을 지지 않는 천인과는 구별된다. 부곡민의 경우 중국의 부곡과 달리 주가의 호적에 부적되지도 않았던 데다 국가에 각종 공역을 지고 있다. 이는 분명 천인과는 다른 모습이다. 향, 부곡은 농사를, 소는 수공업을 생산하는 기능을 한다는 해석이 발표되었다. 또 소에선 일부만 수공업에 종사하고 소의 주민 대부분은 농사를 짓는다는 설도 존재한다. 또 소에서 수공업을 하는 주민은 소의 주민이 아니라 진정한 소의 주민은 농사를 짓는 주민들이란 설도 존재한다. 실상 사료가 적은 탓에 이리저리 많은 설들이 난무한다. 이러한 특수 지역은 고려 말이 되면 주민들의 저항과 생산력이 발전하면서 사실상 향, 소, 부곡 제도가 붕괴되어 다른 지역과 실질적으로 차이가 없어졌다. (웅진 지식 하우스, <미래를 여는 한국의 역사> 참조) 양계(북계, 동계)는 특수 군사 지역으로 그 아래에는 군현 대신 도호부와 진이 있었다. 속현이 많은 5도 지방과 다른 점은 대부분 진에 지방관이 파견되었다는 점인데 국방을 위해 당연한 조치라고 할 수 있겠다. 5도 양계였던 시절 동계는 특이하게 국경선에서 한참 떨어진 현재의 [[강원도]] [[영동]] 지방까지 관할 지역으로 걸쳐 있었는데, 이는 [[여진족]] [[해적]]들 때문이었다. 5도 양계 이외에 지금의 함경도 지역에 [[여진족]]들을 직간접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기미주현을 설치하여 고려와 인접했던 여진족들을 관리하였다. 이곳에는 실제로 고려 관리들을 파견하여 고려 민호로 등록하고, 이 지역에 고려법을 적용하는 등 이곳을 관리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실제로 수천에서 만 명 이상 규모의 여진족들이 지금의 [[길주군]] 이북지역에서도 귀화하려고 했으나 고려에서는 길주 이북까지는 관리의 어려움으로 귀화를 거부하였다. 하지만 [[금나라]]를 세운 완안부와의 갈등으로 이 지역을 중심으로 [[동북 9성]]을 설치하였고, 이후 결국 동북 9성의 반환과 금나라의 건국으로 이 지역에 대한 고려의 영향력은 줄어들게 되었다. 고려 전기 서경의 지위는 다른 3경과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높다는 점을 제외하면 수도인 [[개성시|개경]] 외에도 따로 부(副) 수도들이 존재했다. 흔히 고려 3경이라고 부르는데 사용되는 맥락에 따라 개경 + 부수도 2곳('개경, 서경, 동경' 또는 '개경, 서경, 남경')을 가리키거나 개경을 제외한 나머지 세 곳(서경, 동경, 남경)을 지칭할 수도 있다. 개경을 포함한 3경에는 동경과 남경이 동시에 들어간 시기가 매우 짧아서 시대에 따라 둘 중 하나가 빠졌다가 다시 포함되었다가를 반복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고려/고려10도.jpg|width=100%&height=565]]}}}||{{{#!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2BF8McN.jpg|width=100%&height=565]]}}}|| ||<-2> {{{#000000,#ddd 고려 초기 성종 때의 [[10도]] 행정구역(좌), [[5도 양계]]와 [[천리장성]](우).}}} || 고려 후기의 행정 구역은 북방으로 영토가 확장되는 등 변동이 있어서 양계가 없어지고, 대신 동북면(고려 말 [[이성계]]의 본거지로 유명)과 서북면이 설치되었다. 그리고 경기 및 각 도의 행정 구역에도 여러 변동이 있었다. 동계의 영동 지방과 교주도가 '[[강원도|교주강릉도]]'로 통합되고, [[황해도|서해도]]의 상당 부분과 양광도의 [[서울특별시|남경(한양)]], [[양주시|양주]], [[부평]], [[인천광역시|인주]] 등 서북부 지역이 경기에 편입됐다. 이로써 이어지는 [[조선]]의 [[8도]]와 유사해졌다. [[파일:attachment/고려/여말_행정구역.png]]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