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구려부흥운동 (문단 편집) === 후고구려와 고려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후고구려)]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고려)] 통일신라 내부에서 고구려 유민들은 [[한주]], [[삭주]], [[명주]] (+[[패강진]]) 3주에 소속되었는데, 구백제 지역에 비해서는 비교적 신라 조정에 협조적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9세기 초반에 일어난 [[김헌창의 난]] 당시, 구백제 지역 대부분에 원신라 지역 일부까지 난에 가담하며 조정의 권위가 흔들릴 때까지도 북부 3주는 반란에 동참하지 않고 굳게 방어한 데서 드러난다. 후속 반란인 [[김범문]]의 난 역시 한산주에서 일어났으나 신속하게 진압한다. 신라 수도에서 거리가 멀어 자칫 통제하기 힘들 수 있던 북부 3주를 순조롭게 지배한 점은 통일신라 체제가 수백년을 안정적으로 존속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9세기 후반들어 중앙의 행정력이 약화되자 북부 3주도 차츰 독립성을 띄기 시작한다. 결국 9세기 말, 통일신라에서 현재의 평안남도, 황해도, 경기도, 강원도 지방에 흩어져 살던 고구려 유민들이 [[궁예]]의 밑에서 규합되어 [[후고구려]]를 세우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궁예 본인은 비록 옛 고구려 땅에서 봉기하기는 했지만 본인의 연고지는 삼국시대부터 신라였던 지역, 즉 훗날의 [[경상도]] 계통이었고, 굳이 그에게 고구려 유민의식에 얽매일 이유는 없었다. 결국 건국 3년만에 국호를 고구려 계승의 의미가 강한 '고려'에서 [[불교]]적이고 추상적 명칭인 [[마진]]으로 바꾸며, 수도 역시 고구려 유민의식이 강했던 [[패서]] 지방 [[송악]]에서 고구려 유민의식과 연관성이 적은 [[철원]]으로 옮기고 [[아지태]] 등 청주 출신 백제계 호족을 중용한다. 그리고 7년 후 911년에 국호를 [[태봉]]으로 바꾼다. 이런 고구려색 빼기는 패서호족을 견제하기 위해서였고[* 동시에 본인이 한때 [[불교]]의 [[승려]]였던 까닭에, 그가 정신병을 앓으면서 이상한 망상에 빠진 것과 합쳐져서, [[고구려]]고 뭐고 [[아돌프 히틀러|자기 입맛에 맞는대로 나라를 재구축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초기의 고구려 부흥 행보는 자신의 건국에 도움이 되니까 했을 뿐 궁예의 진심은 고구려 부흥에는 관심이 없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패서호족은 당연히 이에 반발했고 결국 패서호족의 우두머리인 [[왕건]]이 [[역성혁명]]을 일으켜 [[태봉]]은 멸망하고 918년 [[고려]]가 세워진다. 원신라 출신인 궁예와 달리 왕건은 대대로 패서 호족으로 고구려 유민의식에 완전히 귀속된 신분이었기 때문에 궁예와 달리 국명에서부터 엿보이듯 고구려 계승 의식을 분명히 했다. 고려의 경우 통일신라의 영역을 대부분 그대로 물려받았다고 하면서 고려의 고구려 계승성을 깎아서 보려는 견해가 있으나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고려는 예전 통일신라 시대 때는 지배를 제대로 하지 못했던 대동강 영역은 물론 직접 손을 뻗치고 있었고, 그 이북 지역으로도 약간 올라간 영역에서 시작했다. 또한 고려가 혼인 정책을 적극적으로 편 건 사실이지만 이는 신라 구왕족 계열에 한정된 조치는 아니었고, 고려는 굳이 경순왕의 귀부가 아니더라도 그 전부터 신라에게서 대왕 인정을 받는 등으로 확고한 외교적 우위에 있었으므로[* 아이러니하지만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고려가 바로 신라와 이러한 관계에 있었다. 왕경 코앞과 전략적 요충지에 설치된 굴욕적인 군사령부의 존재도 그렇고, 신라 입장에서는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책봉하며 입장이 뒤집힌 지 몇 백 년만에 다시 처하게 되는 역사의 반복이었다.] 이 혼인 정책을 통해 신라 왕실의 정통성을 흡수했다곤 볼 수 없다. 고구려 계승 의식을 주도한 서경파가 신라계인 주류 개경파가 대립했다는 것도 대단히 잘못 알려진 설이다. 서경 세력 자체가 왕건이 심혈을 기울여 육성한 세력이었고, 개경의 정치 세력 자체가 신라계였다는 것도 잘못 알려진 설인데 왜냐하면 신라계 인물들이 고려 조정에 대거 동참한건 맞지만 12세기 즈음 가면 이미 고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이 관철된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그나마 개경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이 내세웠다는 것도 결국은 "신라 계승"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삼한 계승"이었다. 고려가 건국되었을 당시까지는 성공한 고구려 부흥운동의 또 다른 사례인 발해가 엄연히 그때까진 엄존했으나, 발해는 고려와는 달리 국제사회에서 고구려의 후계자란 명분을 온전히 누릴 수가 없었던 데다가[* 발해의 중심지가 옛 고구려의 중심지완 달랐다는 점은 이 대목에선 전혀 관련 없는 사항이다.] 한반도에서 후삼국시대가 진행되던 당시에는 발해 역시 왕조말기 증상으로 힘이 약해지고 거란과의 연이은 소모전을 치르고 있는 상황이어서, 한반도에서 벌어지는 일에 개입을 전혀 할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발해는 그 차지한 면적으로만 보면 현대 한국인들의 만주 애호 현상을 만족시켜주기 충분했지만 당나라와 신라는 고구려를 멸망시켰다는 사실 자체가 국가 위신과 직결되는 문제였기에, 이 두 나라는 발해를 도저히 고구려로 인정해줄 수가 없는 형편이었고 고려 역시도 같은 고구려계 형제국이라는 점은 인정했지만 고구려의 적통은 고려 왕조라는 사실을 주지했기 때문이다. 발해 또한 자존심만 내세우다가 국제 관계를 파탄으로 이끌 수가 없어서 이런 문제에서 자유로운 일본과의 관계에서만 '고려 국왕'을 자칭할 수 있었고 이마저도 지속적이지 않았으며[* 일본 사서에서도 고려가 아닌 발해로 호칭한다.] 당과 신라를 상대할 때는 결국 '진', '발해' 등 다른 국호를 사용할 수밖엔 없었다. 서양사의 불가리아 제국도 초반에는 로마 제국과 동등한 황제를 자칭할 권리를 인정받았을 정도로 성장했으나, 일단 로마에게 망한 후 부활했을 때는 로마 제국의 위신 문제 탓에 로마 제국은 처음과는 달리 도저히 불가리아 제국을 인정해줄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때문에 잠깐 재흥한 불가리아 제국은 로마 제국과의 계속된 분쟁 끝에 [[바실리오스 2세]]에게 망하고 만다. 발해는 신라와 당에 대해 계속해서 고구려의 후계자를 무리하게 국서에서 고집해서 벌어질 수 있는 이런 문제를 피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현대의 [[마케도니아 공화국]]이 [[그리스]]와의 관계 탓에 국호를 [[북마케도니아]]로 변경해야했고[* 다만, [[발해]]랑은 달리, [[북마케도니아]]는 [[고대 마케도니아]]와의 연계성이 영토말고는 그닥 관계가 없었던 탓에, 마케도니아라는 국명을 밀어붙이지 못한 부분도 있다. 이미 [[그리스]]에 마케도니아라는 이름의 행정구역이 있는데다, 심지어 고대 마케도니아의 진짜 중심지와 발원지는 현대의 그리스령 지역에 있었으므로, 국제사회에서 [[마케도니아 국명 분쟁]]을 핑계로 북마케도니아에게 그리스가 [[갑질]]하는 것만 뭐라했을 뿐, 마케도니아에 대한 역사적인 연원에 대해서는 그리스의 주장에 손을 들어주고 있었다. 이 문제는 [[발해]]의 국명 문제보다는, 차라리 [[오스만 제국]]의 [[로마 제국]]으로서의 정통성 승계 문제에 더 가깝다.], [[대만]] 또한 [[중화민국]]이란 국호를 국제사회에서 온전히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과 비슷하였다. 반면 적어도 [[궁예]]의 [[후고구려]]와 [[왕건]]의 [[고려]]는 이 문제에 관련해서 매우 자유로웠다. 딴지를 걸 [[당나라]]가 당시엔 이미 [[오대십국시대]]의 개막으로 무너져 없었던 데다가, [[고구려]]를 멸망시켰던 또 다른 주역인 [[신라]]는 [[후삼국시대]] 들어서는 이미 왕건에게 압도당해 고려왕 왕건을 도리어 대왕으로 칭하고 신라왕 자체를 대왕 고려왕의 아래에 스스로 두는 굴욕을 자처하는 꼴이었으며, [[발해]] 또한 [[거란]] 전선에 국력을 집중해야 했기에 고려의 고구려 계승에 있어 상관할 처지가 아니었다. 때문에 현대 [[한국인]]들의 기호일 [[만주]] 영토와는 전혀 별개로 명분에서 그다지 밀릴 형편은 아니었다[* 사실 [[만주]]는 [[다칭 유전]]을 빼면, 예나 지금이나 거의 쓸모없는 땅이라서, 차지했더라도 그 [[발해]]가 죽을 쑨 것처럼 계륵같은 취급이 되었을 판이다.]. 만약 발해가 국력을 추슬러 중흥에 성공했다면 얘긴 달라졌겠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고려는 발해인들을 '형제'로 일컫는 여유를 보이면서 오히려 강자의 입장에서 호기롭게 포용할 수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