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구려부흥운동 (문단 편집) === 발해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발해/역사, 문단=1)] 한편 일군의 고구려 유민들은 고구려 멸망 이후 당나라 영토인 요서의 [[영주]](융저우)로 강제 이주되었는데 영주에서 [[거란족]] [[이진충]]이 반란을 일으킨 틈을 타 [[걸걸중상]], [[대조영]] 등을 비롯한 고구려 유민들이 만주 동부 동모산으로 도망가, 678or684년 [[발해]]를 건국하고 추격하는 당군을 [[천문령 전투]]에서 격파하여 고구려 유민들을 규합하였다. 이는 고구려 멸망 후 몇십년만에 이뤄낸 성공적인 부흥운동이었다. 동모산은 옛 고구려의 세력권인데다가 초기 발해 주민은 대부분 고구려 유민이었고 배경 때문에 발해에겐 고구려 계승의식이 있었다. 그러나 발해에겐 당나라와 신라의 강력한 견제 탓에 국제 사회에서 고려로 행세하질 못한 뼈아픈 한계가 있었고[* 일본 역사서에 고려와 발해가 번갈아 나오는 것도 발해의 사신은 스스로를 고려로 불렀으나 당나라와 신라의 사신은 발해로 불렀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현대의 남북한에게 있어선 고려의 고구려 계승을 더 강하게 주장할 순 있게 되었으나, 발해에 대해선 연고권이 약해지는 상황이 되고 말았기에 역시 아쉬운 부분이다. 이 당시 대내외적으로 '고려'라 칭했다면 지금처럼 고구려계냐 말갈계냐 하는 논란 자체가 없었을테니 현대 한국인들 입장에선 아쉬운 부분이기도 하다[* 사실 말갈계라도 고구려 계승을 주장할 수 있다. 말갈도 고구려의 일부였으니 그렇다. 이건 서양사로 치면, [[로마 제국]]의 지배를 [[프랑크 제국|한 번이라도 받았거나]], [[라틴 제국|그랬던 나라를]] [[신성 로마 제국|차지한 나라라면]] [[오스만 제국|아무나 로마의 후예라고 자칭할 수 있던 것]]과 같다.]. 후술하지만 이런 측면에선 고구려 계승성에서 고려에 비해 치명적으로 처졌던 건 부인할 수 없다. 후세의 누군가들이 보기 좋게 영토만 크게 차지한다고 장땡이 아니었다는 얘기.[* 서강대학교 출판부에서 출간한 '발해 국호 연구' 참조] 하지만 그만큼 통일신라의 삼한일통 주장이 당시 국제사회에선 더욱 큰 지지를 받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