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구려 (문단 편집) ==== 명칭 ==== || '''{{{#c5b356 언어}}}''' || '''{{{#c5b356 명칭 및 해설}}}''' || || '''[[한국어|{{{#c5b356 한국어}}}]]''' ||'''고구려(高句麗, Koguryŏ, Goguryeo)''' / '''고려(高麗, Koryŏ, Goryeo)'''[br][br][[장수왕]] 때부터 '고려'라고 고정하여 불렀지만 현대 한국에서는 [[태조(고려)|왕건]]의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 여전히 '고구려'라고 부른다.|| || '''[[중국어|{{{#c5b356 중국어}}}]]''' ||'''가오거우리(高句丽, Gāogōulí) / 가오리(高丽, Gāolí)'''[* '高句丽', '高丽'로 쓰기도 한다. 중국인들이 한국인들을 비하할 때 쓰는 말인 '가오리방쯔'(高丽棒子)도 여기서 나온 말이다.] 현대 [[관화]] 기준이다. [br][br]'가오리'가 일반적이며, 굳이 '高句丽'라고 쓸 때는 '句'의 독음이 일반적인 '쥐(jú)'가 아니라 '거우(gōu)'가 된다. 이 독음법은 오로지 고구려라는 단어에만 존재하기 때문에 중국인들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고 컴퓨터 입력기에도 반영되어 있지 않다. 일부 유사역사학자들이 고구려를 '가우리'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그 근거는 결국 중국어 독음인 것. 그러나 이 독음 역시 결국은 [[보통화|현대 중국어]]의 독음일 뿐이며, [[중고한어|옛 중국어의 한자 발음]]은 현대 중국어보다는 오히려 [[한국 한자음|한국식 발음]]과 상대적으로 더 가깝다.[* 물론 상대적인 의미이다. 현재 한국의 한자음은 구어 사용의 변화에 따라 변화한 중국 한자음과 달리 대체로 당나라 시절의 장안음이 큰 변화 없이 고착된 것으로 본다. 상세한 것은 아래로.] [br][br]고구려의 경우 [[한나라]]에서 사용한 [[상고한어]]로는 "kˤaw kˤo rˤe", [[당나라]]에서 사용한 [[중고한어]]로는 "kɑu kəu liᴇ"로 발음했다. 고려의 경우 [[상고한어]]로는 "kˤaw rˤe", [[중고한어]]로는 "kɑu liᴇ"로 발음했다.|| || '''[[일본어|{{{#c5b356 일본어}}}]]''' ||'''코쿠리([ruby(高, ruby=こう)][ruby(句, ruby=く)][ruby(麗, ruby=り)], Kōkuri) / 코라이([ruby(高, ruby=こう)][ruby(麗, ruby=らい)], Kōrai) / 코마([ruby(高, ruby=こ)][ruby(麗, ruby=ま)], Koma)'''[* [[삼국시대]] 고구려를 가리킬 때] [br][br]때때로 '高麗', '狛(박)', '駒(구)' 등으로 써 놓고 '코마(こま)'라고 읽는 경우도 있다.|| || '''[[베트남어|{{{#c5b356 베트남어}}}]]''' ||까오 꺼우 리(Cao Câu Ly)[* [[https://vi.wikipedia.org/wiki/Cao_C%C3%A2u_Ly|베트남어 위키백과]].], 고구려(Goguryeo)[* [[http://world.kbs.co.kr/service/contents_view.htm?lang=v&menu_cate=history&id=&board_seq=60006&page=23&board_code=|KBS World]].] 전자는 한자의 베트남식 독음이고 후자는 한국어의 로마자 표기를 따른 것이다. 베트남의 문자는 로마자를 기반으로 한 [[쯔꾸옥응으]]이기에 외래어를 표기할 때 로마자 표기를 그대로 살리는 경우가 있으므로 KBS World에서는 이에 준하여 표기한 듯하나, 전근대의 한국 관련 고유 명사를 베트남어로 칭할 때는 한자음의 베트남어 독법을 적용하는 경우가 더 많다.|| || '''[[티베트어|{{{#c5b356 고대 티베트어}}}]]''' ||케우리(Ke'u-li)[* 돈황문서 〈북방 몇몇 나라의 왕통에 관한 기술〉(Pelliot Tibetain 1283)]|| || '''[[돌궐|{{{#c5b356 고대 튀르크어}}}]]''' ||뵈퀼리(𐰋𐰇𐰚𐰠𐰃, Böküli)[* 돌궐 〈[[궐특근|퀼 테긴]] 비문〉][br][br] 고대 튀르크어에서 b와 m의 발음은 통용되므로 정확한 발음은 '뫼퀼리(Möküli)'가 된다.|| || '''[[그리스어|{{{#c5b356 그리스어}}}]]''' ||무크리(Moúkri)[* 《Historiam》, 자세한 설명은 [[한국-그리스 관계#s-3.1|해당 항목]]으로.]|| || '''[[산스크리트어|{{{#c5b356 산스크리트어}}}]]''' ||무쿠리(Mukuri)[* 《범어잡명》], 쿠쿠테스바라(Kukutesvara)[* 한자 음차로는 '구구타의설라'(俱俱陀醫說羅), 의미는 '계귀'(鷄貴). 즉 '쿠쿠테'는 '[[닭]]'이라는 의미이고(닭의 울음소리에 대한 의성어라는 설이 있다.) '스바라'는 '귀하다'라는 의미라고 한다. 닭의 신을 받들어 모시기에 닭의 깃을 꽂아 장식으로 삼는다는 해설과 함께 기록된 호칭이다. - 《대당서역구법고승전》]|| '고구려'라는 이름은 [[중국]] [[후한]]의 역사가 [[반고]](32~92)가 지은 《[[한서]]》 〈지리지〉에 최초로 등장하며, [[한사군]] 중 [[현도군]]에 속한 현인 '고구려현'(高句驪縣)이라는 지명으로 나온다. 이는 한나라의 지명 조어법과는 상이하므로, '고구려'는 일대의 토착민들이 본래 자신들의 마을 또는 지역을 부르던 고유어 지명으로 추정된다. 현도군 고구려현은 본래 [[오녀산성]]과 [[국내성]]이 있는 압록강 [[지안시(지린성)|지안시]] 일대에 있었으나 기원전 [[75년]]에 토착민의 강력한 저항으로 흥경([[푸순|신빈만주족자치구]] 일대)에 이전하였으며, 1세기에 다시 무순([[푸순|푸순현]] 일대)으로 후퇴하였다. 이 과정은 나라로서의 고구려가 성립하는 과정이기도 했는데, 부여계 유민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 [[졸본]]에 도읍을 세웠으며 이들도 '고구려'라는 일반명사를 국호로 사용하게 되었다. 현도군의 '고구려현' 쪽도 계속 이름은 남아 있다가 서기 14년 고구려 [[유리명왕]]에게 흡수당했다. '''그래서 《삼국사기》에는 고구려가 고구려를 공격하여 복속하는 대목이 나온다.''' >오이(鳥伊)와 마리(摩離)에게 명하여 병사 20,000명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양맥(梁貊)을 정벌하여 그 나라를 멸망시켰다. 계속 진군하여 한의 '''고구려현'''을 습격하여 빼앗도록 하였다. >三十三年 秋八月 王命烏伊 摩離 領兵二萬 西伐梁貊 滅其國 進兵襲取漢高句麗縣 >---- >《[[삼국사기]]》 권13 〈고구려 본기〉 1 유리왕(琉璃王) 33년 가을 8월 건국 초기에는 국명이 여러 가지로 나타나서 고구려(高駒驪), 구려(句麗), 구려(駒驪), 고리(高離) 등으로 기록되었는데 주로 고구려(高句麗)의 빈도가 가장 높았다. 당연하겠지만 이는 고유어 이름을 한자를 빌려 나타내는 과정에서 여러 표기가 나타났다가 점차 '고구려'로 통일된 것이다. 고구려의 기원과 관련되어 졸본부여나 '맥'(貊)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후 [[4세기]]부터는 '고려'(高麗)로 불리기 시작하여, [[5세기]]에 이르러서는 '고구려'라는 이름은 거의 등장하지 않고 '고려'로만 불리게 되었다. 현재 사학계의 정설은 '''[[장수왕]] 때 고구려가 [[고려]](高麗)로 고정되어 멸망할 때까지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실은 한국사 교과서에도 실리지 않아 한국의 비전문가들 사이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듣보잡]]인 경우가 많다. 장수왕 때 고려로 국호를 바꿨다는 증거들은 여럿 있다. 가령 5세기 장수왕 대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충주 고구려비]]에는 고려라는 두 글자가 떡하니 박혀 있고, '''장수왕 시기부터 중국 측 문헌에 '고려'라고만 표기'''되기 시작된다. 전성기를 맞이한 장수왕 재위기에는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는 등 국가의 분위기를 일신하는 여러 정책들이 추진됐는데, 국호 역시 그 일환으로 변경된 것으로 추정된다. 왜 바꾸었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아무래도 고구려(高句麗)의 고(高)와 구(句)의 발음이 비슷해서 빨리 발음하면 고려(高麗)나 구려(句麗)로 줄어들게 되는데 구려보다는 고려가 한자의 의미를 봤을 때, 물론 어원은 한자의 의미와 무관한 고유어에서 유래했겠지만 더 그럴 듯해 보여서 [[고려]]로 변경했을 수도 있다.[* 물론 초창기에도 '구려', '고례(高禮)' 등의 2음절 이름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애초 이름이 '고려'와 비슷한 그 무엇이었고, 앞의 고(高)는 접두어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고구려라는 명칭이 처음 나타나는 《[[한서]]》 〈지리지〉에서는 [[현도군]]의 속현으로 고구려현과 함께 상은태(上殷台)현과 서개마(西蓋馬)현이 소개되는데, 이 둘은 전부 방위어인 상(上)과 서(西)로 시작하므로 고구려 역시 본래 방위어 고(高)와 토착 지명 구려(句麗)의 합성어였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병도]] 교수는 고(高)의 한국어 고유 어휘인 '수리'와, 고을을 뜻하는 '골'을 연결시켜 고구려의 고유어 명칭을 '수릿골'이라고 추정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국호가 '고려'로 변경된 것은 의도하진 않았지만 국명의 본래 형태와 유사하게 돌아온 셈으로 볼 수 있다. 이 '구려(句麗)'의 정확한 어원은 불명이나 다음과 같은 추측이 있다. 가장 유력한 설은 《[[삼국지]]》 〈동이전〉에 소개된 [[성(건축)|성]](城)을 뜻하는 고구려의 고유어 '구루(溝漊)' 및 《[[삼국사기]]》 〈지리지〉에 기록된 고구려 지명에서 역시 성의 의미로 자주 사용된 '홀(忽)'과 연관짓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이를 현대 한국어 '고을'과 연관짓기도 한다. 그러나 이 단어는 [[중세 한국어]]에서 'ᄀᆞ옳'이었으며, 중세 한국어 자료인 [[용비어천가]]에서는 '조ᄏᆞᄫᆞᆯ(粟村)'이라는 지명 표기가 나와 본래 어형이 '*ᄀᆞᄫᆞᆯ'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ㅸ'이 'ㅂ'이었을 [[고대 한국어]] 시기의 자료에서도 기부리(己富利: [[일본서기]]), 거벌(居伐: [[울진 봉평리 신라비]]) 등으로 문증된다. 따라서 어중에 ㅂ이 있었던 '고을'은 고구려어 '*고로(溝漊)' 및 '*골(忽)'과는 다른 어원을 가지는 것으로 추정된다.] 또 일각에서는 고구려를 일컫는 고대 돌궐어 '뵈퀼리(𐰋𐰇𐰚𐰠𐰃, Böküli)'[* 고대 튀르크어에서 b와 m의 발음은 통용되므로 정확한 발음은 '뫼퀼리(Möküli)'가 된다.]와 [[그리스어]] '무크리(Μούκri)'에 주목하여 구려가 '맥'(貊)과 '예'(濊)의 병치형 합성어였을 것이라 추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후 [[동명성왕]]이 세운 나라를 [[보장왕]] 때까지 통째로 고구려, 대조영이 세운 나라를 [[발해]], [[궁예]]가 세운 나라를 [[후고구려]][* 단, 근래 한국 사학계에서는 후고구려 대신 최종 국호인 [[태봉]]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왕건]]이 세운 [[고려]]를 그냥 고려라고 부르는 관례가 생긴다. 이는 우리가 '고려시대'라고 부르는 그 시대 중에 성립된 관습이라고 볼 수 있다. 언급한 네 국가 모두 궁예가 기분 내킬 때마다 바꾼 태봉을 제외하면 다 고려가 정식 국호였다. 자세한 건 [[후고구려]], [[발해]], [[태봉]], [[고려]] 문서로. 장수왕 이래로 고구려를 고려라고 불러 왔던 탓에, [[오대십국시대|5대 10국 시대]]와 [[북송]]을 거친 이후부터 전근대까지의 중국과 일본에서는 왕건이 세운 고려도 고구려가 거의 그대로 이어지되 왕조만 바뀐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았다. 송나라 사신이 쓴 《[[고려도경]]》에서도 중세의 고려를 고씨 고려가 망하고 왕씨가 일어나 세운 고려라 표현했으며, 중국 역사학자들이 종종 이렇게 부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오늘날 한국에서 쓰듯이 고구려, 발해, 고려 등으로 부른다. 현대에 [[로마자]]로 표기할 때는 [[북한/로마자 표기법|북한식 표기법]]을 따른 Koguryŏ와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남한식 표기법]]을 따른 Goguryeo 두 가지가 쓰인다. 남한 매체가 세계적으로 영향력은 높지만 고구려 자체가 현 북한 지역에서 기반한 왕조였다보니 두 표기법의 저명성은 엇비슷한 편이다.[* 구글 검색결과도 서로 비슷한 편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신청서에서는 북한과 중국의 세계유산으로 등재했으므로 [[매큔-라이샤워 표기법|Koguryŏ]]로 표기했다. [[개성 왕씨|왕씨]] 고려 때는 구고려(句高麗)[* 《[[고려사]]》 〈[[윤관]] 열전〉.], 구려(駒驪)[* 《고려사》 〈[[묘청]] 열전〉. [[대화궁]] 팔성당에 모신 신의 명칭에 붙어 있다.]라는 명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또한 자국을 고구려의 고려에 맞춰 후고려(後高麗)[* 태자사낭공대사비, 《[[의천|대각국사]] 문집》.]라고 칭하기도 했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는 아예 고구려와 고려를 동일시하여 고구려를 우리 고려[我高麗]라고 부르는 축문도 등장한다.[* 《동국이상국집》 전집 제38권 〈제[[소정방]] 장군문〉.] [[궁예]]가 처음 세운 나라 이름이 '후고구려'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그냥 '고려'였다가 나중에 마진, [[태봉]]으로 바꾼 것이었다. 왕건이 세운 [[고려]]는 궁예가 처음 썼던 국호로 되돌아간 것. 일본에서 발견된 외교문서에서는 고구려의 뒤를 이은 [[발해]]도 고려라는 이름을 사용했음이 나타난다. 사실 [[발해]]라는 국호는 [[당나라|당]]과의 협상에서 어쩔 수 없이 합의된 대외용 국호였고, 어디까지나 공식 국호는 고려였으나 워낙 발해라는 국호 사용 빈도가 평소에도 높다보니 발해인들 스스로도, 적어도 요나라 시대 후기, 금나라 때부터는 본인들이 발해인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어쩌는 수 없이 인정하게 된다.[* 《발해 국호 연구》, 발해유민 연구 저서 참조.] 장수왕 대의 국호 변경을 대체로 제대로 반영한 사극으로는 [[태조 왕건]]이 있다. 고증 등에서 문제 제기가 여럿 있는 사극이긴 하지만, 극중에서 고구려가 장수왕 때 고려로 바꾼 것은 제대로 반영해서 해설했으며, 궁예가 처음 세운 나라의 이름 역시 후고구려가 아닌 고려로 불렀다. 그런데 극중에서 옛 고구려를 언급할 때는 고구려라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옛 고구려도 나중 이름을 써서 고려라고 불렀을 가능성이 높지만 시청자들이 헷갈려 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그냥 고구려라 한 듯. 같은 [[이환경]] 작가가 대본을 쓴 [[연개소문(드라마)|연개소문]]에서는 고구려로만 표현했다. 태조 왕건과 달리 연개소문은 아예 작중 내내 고구려를 언급해야 하는데 극중에서 계속 고려라고 부르면 시청자들이 혼란을 느낄 게 뻔하니…. 이외에도 고구려 유민 고모의 묘지명(高牟墓誌銘)에 따르면 별칭으로 동해지동(東海之東, 동해의 동쪽), 한향(韓鄕)이라 부르기도 했고 [[삼한]]=삼국으로 여겨지면서[* 지금은 단순히 그렇게 발전한 건 아니란 게 증명되었지만 사학, 고고학이 많이 발달하지 않았던 당대에는 그렇게 여겨졌다.] 그 중 [[마한]]에서 유래했다고 여겨 그냥 마한이라 불리기도 했다.[* 여기에서 평양성의 별칭을 마한의 수도라는 뜻의 마읍(馬邑)으로 부르기도 했다. 이후 발해 및 발해 부흥운동으로 생긴 후속국가들도 자신들이 마한에서 유래했다고 여긴다. 이에 대해서는 고구려가 장수왕대에 백제를 달달 털어서 대부분의 국토를 장악한 뒤, 마한도 (거의) 정복했다고 인식되면서 마한=고구려가 되었다는 가설도 있다.] 근데 보통 고구려는 마한과 동치되긴 했지만 이게 좀 어지러워서 [[진한]]이나[* 이 경우 그냥 삼한을 통틀어서 진한이라 지칭한 것 같다. 한반도쪽을 가리키던 진국+한국을 적당히 섞어서 그렇게 부를 수도 있기 때문.] [[변한]][* 마한이 백제와 동치되었을 때는 삼한 중 남은 게 변한밖에 없었기 때문에 고구려가 변한에서 나왔다 여겨진 것으로 보인다.]으로 불리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