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건 (문단 편집) == 생애 == 1938년 1월 2일 아버지 [[철학자]] [[고형곤]]과 어머니 장정자 사이에서 3남 2녀[* 둘째형(고경)은 요절.] 중 [[차남]]으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6.25 때는 아버지 고향인 전북으로 내려와 전주북중학교를 다녔다.[[https://www.joongang.co.kr/article/11075224|#]] 이후 [[경기고등학교]][* [[김우중]], [[이종찬(1936)|이종찬]], [[신구|신구]] 등과 같은 학교 동창 사이이다.]를 거쳐 [[서울대학교 정치학과|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회고록에서 법학과보다 정치학과가 입학점수가 10점 더 높았다고 한다. 동숭동 캠퍼스 다리 건너 법학과는 육법전서를 붙잡고 씨름하는 등 학업에 열성이었는데, 정치학과는 공부는 하지 않고 토론이나 발표 등 문화생활에 열중했다고 회고했다. 재학 중 학생회장을 하는 등 정치 참여에 뜻을 두었으나 현실 정치에 회의감을 느끼고 고시 준비를 시작했다고 한다.][* 아버지인 고형곤과는 1학년 때만 같은 캠퍼스에서 교수이자 학생으로 지냈다고 한다. 이후 2학년 때 고형곤은 전북대 총장으로 가게 되어 헤어진다.] 1961년 고등고시 행정과(현 [[5급 공개경쟁채용시험]])에 합격했다.[* 처음 본 시험은 낙방했고, 재수를 해서 합격했다.] 이후 행정 관료로서 녹화사업 계획을 수립하고 [[새마을 운동]]을 기획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 이후 강원도 부지사, 내무부 지방국장을 거쳐 만 37세에 [[전라남도]]지사[* 당시는 지방자치제도가 시행되지 않아 각 지방단체의 장은 관선으로 차관급 직위이었다.][* 고시출신이라고 하더라도 통상적으로 생각하기 힘든 굉장히 빠른 승진인데(비군인 출신 최연소) 이는 고건이 새마을 운동을 실제로 기획하고 성공시킨 사람이기 때문이다. 박정희 정권이 정권 차원에서 추진한 사업이었으니 그에 대한 일종의 보상 인사인 셈.]에 취임했다. 재임중 [[함평 고구마 사건]]을 수습했으며, [[영산강 하굿둑]] 착공과 광주 하남공단, 여수 신항 사업 등을 추진했다. 1979년 [[박정희 정부]]의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정무 제2[[수석비서관]]이 되었는데, 이후 1980년 [[5.17 내란]]이 발생한 날 군정에 반대해 사임하였다.[[https://www.google.com/amp/s/mnews.joins.com/amparticle/11521944|#]] 그러나 [[전두환 정부]]가 완전히 들어서자 지인들의 요청으로 다시 교통부장관으로 들어왔고 [[민주정의당]]에 들어갔다.[* 이 점 때문에 훗날 민주진영에 들어온 고건을 운동권 계열에서 비판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고건은 충분히 비판 받을만하다고 인정하면서도 정치인이 아닌 관료의 길을 걷는 입장에서 어쩔 수 없었다는 해명을 하였다.] 이듬해 농수산부 장관을 지내고,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1983년 미국 [[하버드대학교]] 객원연구원으로 있다가 이듬해 1984년 미국 [[MIT]] 국제문제연구소 객원교수로 임명되었으나 곧 귀국한다. 1985년 민주정의당 소속 국회의원으로 당선됐으며, 민정당 지방자치제특별위원회 위원장, 1987년 민주정의당 전북도 지부장, 내무부 장관을 지냈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전라북도 군산시-옥구군 지역구에 출마하여 [[민주한국당]] [[김봉욱]]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87년 5월에는 내무부장관이 되어서 [[6월 민주항쟁]]의 중심에 서 있기도 했다. 물론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기에 2개월만에 물러났다.[* 그러나 제대로라는 건 어디까지나 5공 정권과 [[전두환]]의 입장에서이다. 고건 전 장관은 [[명동성당]] 경찰 투입을 각종 명분을 들이대며 피했는데, 역사에 민주화 시위 진압 지시자로 남지 않기 위한 정무적 판단이 개입했을지라도 이것이 신의 한 수가 되었다. 전두환 정부 '부역'만으로도 욕을 먹었는데, 명동성당 진압까지 했으면 민주화 시대에 관료 생활을 이어가는 데 치명적인 오점으로 남았을 것이다.] 하야 후 [[종로구]]에 사무실을 하나 내고 정계에 거리를 두던 중 1988년 [[민주정의당]]의 군산지구당 위원장과 전라북도 지부장에 임명되었다. 임명 직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전라북도 군산시 지역구에 출마하였으나 [[평화민주당]] [[채영석]]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또한 1988년부터 1990년까지 노태우 정부의 관선 [[서울특별시장]]을 지냈다. 첫 서울시장 시절 고건은 서울의 교통 분야에 큰 공헌을 하였는데 실시간 교통 정보 전달을 위한 [[TBS|서울교통방송]]을 설립했고 [[내부순환로|서울내부순환도로]]를 만들었으며 [[2기 지하철 계획]]을 추진시켰다.[* [[https://www.google.com/amp/s/mnews.joins.com/amparticle/11694598|#]] ] 또한 임기중에 서울올림픽이라는 빅이벤트가 치러졌고 대한제국 황실 인물이었던 덕혜옹주와 이방자 여사의 영결식도 재임기간에 열렸다. 하지만 [[한보그룹]] 측 조합들에 알짜배기인 서울 수서지구 택지를 특혜분양하라는 정권의 압력에 원칙을 고수하며 맞서다 1990년 연말에 [[괘씸죄]]로 짤렸다. 그리고 그 후임으로 [[박세직]]이 시장으로 부임하면서 [[수서지구 택지 특혜 분양 사건]]이 터지게 된다. 1991년 공동체의식개혁국민협의회 공동대표를 지냈고, 1994년부터 [[명지대학교]] 제4대 총장직[* 임기: 1994. 03. 17 - 1997. 03. 05]과 한국그린크로스 공동의장을 지냈고 총장 임기 종료 후 명지대학교 석좌교수직에 임명되었다. 1996년부터 1997년까지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로 활동하였다. 이후 문민정부의 마지막 국무총리를 지냈다. 호남계 인사이면서, 군사정권 하에서 승승장구했고, 원만한 대인관계와 넓은 인맥을 가졌으면서, 부패에서도 자유롭다는 점 덕분에 민주화 이후로도 좌우를 가리지 않고 중용되었다. 퇴임 다음 날인 차기 [[김대중|대통령]] 취임일 각료제청권을 행사한 뒤 물러나는 진기록을 세웠다. 김종필 전 총리 서리가 인준되지 않았기 때문. 1998년에는 [[새정치국민회의]] 공천[* 새 정부 각료제청에 협조했다지만, 사실 YS 정부의 마지막 총리를 새 여당('DJ당')의 서울시장 후보로 낸다는 것은 고건 본인은 물론이고 새정치국민회의 내부에서 이미 출마를 선언했던 [[한광옥]]과 [[노무현]]에게도 충격 그 자체였다. 이걸 2020년대로 비유해보자면 [[문재인 정부]]의 마지막 [[김부겸]] 전 총리가 [[국민의힘]] 서울시장으로 출마하는 격이니, 실제로 DJ의 가신이었던 한광옥이 격하게 반발했을 정도. 그러나 김대중 전 대통령은 한 술 더 떠서 [[IMF 사태]]의 수습 명분으로 입각했던 문민정부의 마지막 경제부장관 [[임창열]] 전 부총리를 [[경기도지사]]로 공천했다. 처음엔 경악하던 임창열 전 부총리는 아예 [[자민련]] 출마를 거부하며 극구 새정치국민회의 출마를 고집하기도 했다. 그만큼 YS-DJ 두 정부가 중도 성향 정부로서 차이가 적었고, 국민들에게도 고건과 임창열이 철새라기보다는 안정적 관료 출신 단체장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시대상의 증거다. 물론 야당이 된 [[한나라당]]으로서는 난처하고 또 분통스러운 일이었다.][* 당시 정권 상층부에서는 임기 초반에 정치인 출신 서울시장이 등장하면은 사실상 소통령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김대중 대통령의 여당장악에 문제에 생길 것으로 우려했다고 한다.]으로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민선 [[서울특별시장]] 선거에 당선되어 4년간 시정을 이끌었다.[* 서울특별시의 무리한 요청으로 인해 군인 3명이 사망한 [[육군 CH-47 올림픽대교 추락 사고]]가 이 시기에 발생하였다. 이에 대해 아무런 조치나 사과가 없었다고 2년 뒤 총리 취임 청문회에서 야당 [[한나라당]]의 [[임인배]] 전 의원에게 추궁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주목받지 못하였다.] 당시 고건은 서울에 전국 최초로 온라인 민원 처리 공개 시스템을 만들었으며, 시내버스로 CNG(압축천연가스) 버스를 도입했고, 대중교통 환승할인 제도를 마련하고, 서울종합방재센터를 설립하고, 월드컵을 앞두고 공중화장실 선진화와 개방화장실 도입 등 많은 일을 했다. 또한 난지도 재개발과 [[서울월드컵경기장]] 건립을 비롯하여 임기 말의 2002 월드컵 개최 기간까지 매우 무난한 행정을 펼쳤다. 이렇게 서울특별시를 역대급으로 잘 이끌다보니 임기 마지막 해였던 2002년 초에는 [[새천년민주당]]의 서울시의원 다수가 고건을 차기 서울시장 후보로 지지했을 정도였는데, 당시 민주당 내에서 서울시장에 도전하려는 인물이 [[김원길]] 의원 / [[김민석(1964)|김민석]] 의원 / [[이상수(정치인)|이상수]] 원내총무였던지라 고건 본인이 서울시장 재선에 도전한다면 경선을 하든 안하든 무조건 민주당 후보가 되는게 기정사실이었다. 하지만 10년 전 관선 시장 시절에 처음 추진했던 2기 지하철을 완전 개통시키는 등의 임무 완수를 보람차게 생각한다면서 불출마를 선언했고, 그 해 지방선거에서는 [[한나라당]] [[이명박]]이 당선.[* 이 때 민주당 후보로는 김민석 의원이 출마해서 한 때는 이명박을 여론조사에서 앞섰지만, 월드컵 기간으로 인한 정치적 무관심에다가 '''김대중 대통령의 [[김홍일(1948)|아들]] [[김홍업|3명]] [[김홍걸|모두]] 모두 비리에 연루되는 일명 '홍삼 게이트'까지 겹치면서''' 결국 10%P가 넘는 표차로 이명박이 과반 득표 당선되었다. 만약 이 때 고건이 민주당 후보로 나섰다면 박빙으로 이길 수도 있었고, 그러면 이명박이 5년 뒤 대통령에 당선되는 것도 불투명해졌을테니 이래저래 정치적인 역사에 간접적으로 관여한 셈.] 그리고 2003년 [[참여정부]] 초대 [[국무총리]]에 임명되었다. YS 시절에 이어 두 번째다. 군부-YS-DJ-노무현까지 좌우 가리지 않고 중용된 나름대로 화려한 실적. 국무총리 기록만 놓고 본다면 민주화 이후 각기 다른 성향의 정권에서 국무총리를 지낸 진기록을 갖고 있다.[* 김종필도 제3공화국(말기)-제4공화국-국민의 정부(제6공화국)에 국무총리를 역임하기도 했으나, 이쪽은 민주화 정부에서만 국무총리로 역임한 건 아니다.][* 이후 [[한덕수]] 총리가 참여정부의 마지막 총리이자, [[윤석열 정부]] 초대 국무총리로 임명되었다. 두 총리가 모두 거쳐간 것이 참여정부라는 것이 흥미로운 대목. 두 총리는 권력 교체기까지 재직하여, 고건 전 총리는 [[국민의 정부]]의 각료 제청권을 행사하고 물러났으며 한덕수 총리도 [[이명박 정부]]의 국무회의에 참석했으니 역시 3개 정부 타이 기록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한덕수와 고건 둘다 이명박 정부에서도 각각 주미대사와 통합위원장직 달고 공직생활을 했다는 점이다.] 이후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로 [[대통령 권한대행]]직을 수행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