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계축전쟁 (문단 편집) === 쑨원의 망명과 백랑기의 === 상하이에서의 궐기가 실패했다는 것이 확실해지자 쑨원은 일본 망명의 길을 택했다. 하지만 타이완을 경유하여 고베에 도착한 8월 9일에는 이미 위안스카이의 요청에 따라 일본 정부가 쑨원을 체포하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도아먀 미쓰루]][* 한국에는 [[두산만]]으로 흔히 알려진 그 사람.] 등의 도움으로 고베에 은둔하며 [[후한민]], [[랴오중카이]] 등의 측근들과 합류했다. 이후 [[이누카이 쓰요시]] 등이 쑨원을 옹호하면서 [[야마모토 곤노효에]] 총리는 쑨원 체포령을 취소했다. 이후 천치메이, 쥐정 등이 속속 쑨원에게 합류했다. 쑨원은 일본에서 중화혁명당을 조직하여 토원의 기회를 엿보았다. 한편 2차 혁명과는 무관한 반원운동이 하남성에서 일어났다. 위안스카이의 친척 장진방은 하남도독으로써 갖은 횡포를 부렸는데 이에 [[신해혁명]] 참가자들을 중심으로 한 민군이 조직되었다. 왕천종이 지도하는 하남성 민군은 재물을 털어 빈자를 구원하자는 구호를 걸고 세력이 확장되었고 중원부한군, 혹은 공민토적군으로 스스로를 일컬으며 위안스카이 타도를 외쳤다. 이를 백랑기의라고 한다. 이들이 자유와 평등을 주장했기 때문에 혁명당도 지원을 하였고 쑨원은 능월을 파견해 왕천종과 연락을 취하려 했지만 큰 도움을 주진 못했다. 민군은 하남, 호북, 안휘, 섬서 감숙 등 5개 성까지 세력을 확대하였으나 위안스카이가 돤치루이와 육건장에게 25만의 병력을 주어 돤치루이에게 안휘도독을 겸하게 하고 [[자오티]]를 초비독판에 임명하여 투입하자 백랑기의도 완전히 진압, 실패로 끝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