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계축전쟁 (문단 편집) === 혁명의 진압 === 하지만 위안스카이의 빠른 대응과 호응 부진으로 혁명은 곧 위기에 처했다. 상하이의 경우, 이미 위안스카이가 5월 28일 부하 서기문에게 공안사건을 조작하게 하여 그걸 구실로 정여성에게 해군 부대를 이끌고 상하이 제조국을 수비하게 한 후였다. 또한 해군 총사령관 이정신에게도 많은 돈을 주어 매수했다. 7월 22일의 총공격에 61단과 37단 등 일부 군부대가 혁명군에 호응하여 제조국에 맹공을 퍼부었으나 위안스카이의 지시를 받는 해군이 포격으로 응수하면서 큰 피해를 입었고 18문의 대포와 탄약 170여 상자등 많은 물자를 잃고 퇴각했다. 정여성은 남시의 상단에게 천치메이를 추방하지 않으면 시가지를 폐허로 만들겠다고 위협했고 이 때문에 상인들은 혁명군을 지지하지 않았다. 결국 천치메이는 사령부를 북쪽으로 후퇴시켰다. 다른 지역에서도 상황이 좋지 않기는 매한가지라서 강소성 독립에 마지못해 동의했던 강소도독 정덕전은 얼마 지나지 않아 독립을 취소해버리면서 황싱이 난징에서 피신해야 했고 8월 3일 천중밍도 부하들의 배반과 광서군벌 [[루룽팅]]의 공격으로 광동에서 쫓겨나 [[영국령 홍콩]]으로 망명했다.[* 천중밍은 이 일로 원한을 품게 되어 [[2차 호법운동]]에 반대했고 급기야 1922년 [[영풍함 사건]]을 일으킨다.] 8월 6일 백문울도 무호로 퇴각하면서 안휘성의 독립이 취소되었으며 [[쉬충즈]]의 압력으로 독립을 선포한 복건도독 손도인도 쉬충즈가 8월 9일 복건성을 떠나자마자 독립을 바로 취소했다. 천치메이는 육군 93단을 포섭하여 혁명군에 가담시키려 했지만 93단 단장 진기울은 이미 위안스카이에게 충성하고 있었다. 그나마 1개 대대가 혁명군에 합류하여 유영건의 부대와 함께 제조국을 공격했지만 역시나 해군의 견고한 저항에 혁명군 대대장 장소량이 전사하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고 패주했다. 이어 적십자사, 상단, 조계지가 위안스카이를 지지하면서 천치메이에게 상하이 퇴거를 요구했다. 갑북 호주회관의 혁명군은 조계지에서 출동한 영국군에게 포위되어 무장해제당했고 천치메이는 [[쥐정]]이 지키고 있던 오송 포대로 퇴각해 저항했으나 8월 13일 정부군의 반격에 오송포대를 포기하면서 상하이 방면도 패주했다.[* 이때 [[천치메이]]와 [[장제스]]는 체포 직전까지 갔으나 천치메이의 조카 [[천궈푸]]가 기지를 발휘해서 탈출할 수 있었다.] 8월 18일 난창이 함락되어 9월 1일 강서성에서도 혁명군이 패주했다. [[쩌우루]]의 독립 시도는 아예 성사되지도 못했다. 호남의 탄옌카이도 사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8월 13일 독립을 취소했으며 적극적으로 위안스카이 타도를 주장하던 [[청첸]] 등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9월 12일]] 사천성의 웅극무마저 패주하면서 계축전쟁은 완전히 국민당의 패배로 끝났다. 위안스카이는 반란을 일으켰던 각 지방의 군대를 대대적으로 정비하고 지방관들을 자신의 측근으로 교체하는 한편 많은 부대를 파견하여 각 지방을 장악하고 각 지방의 국민당 세력을 대대적으로 탄압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