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계양군 (문단 편집) == 생애 == 1427년(세종 9년) 8월 12일, [[세종(조선)|세종]]과 당시 궁인이었던 [[신빈 김씨]]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세종(조선)|세종]]에게는 서차님이며 여덟째 아들이다. 1434년(세종 16년) 1월, 계양군(桂陽君)에 봉해졌다. 1437년(세종 19년), [[한확]]의 차녀인 정선군부인 [[청주 한씨|한씨]]와 혼인하여 3남 3녀를 두었다. 정선군부인 한씨는 [[성종(조선)|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의 언니이기도 하다. 계양군은 계유정난 당시 [[수양대군]]을 지지하였으며, 이복 동생인 [[정현옹주]]의 남편 영천위 윤사로와 함께 [[금성대군]]을 탄핵하였고, 같은 해 파평위 윤암[* [[숙경옹주]]의 남편]과 함께 [[금성대군]]과 [[혜빈 양씨]] 등을 공격하기도 했다. 1455년(세조 1년), [[세조(조선)|세조]] 즉위 후, 수충위사동덕좌익공신 1등(輸忠衛社同德佐翼功臣)에 녹훈되고 계양군에 다시 봉작되었다. [[세조(조선)|세조]] 즉위 직후 측근에서 서무의 출납을 맡으면서 [[세조(조선)|세조]]의 신뢰를 얻었으며 [[세조(조선)|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이후 각종 왕실 행사에 참여하였다. 1460년(세조 6년) [[예종(조선)|해양대군]]이 혼인할 때 가례도감 제조를 겸하여, 혼인을 주관하였다. 친동생 [[익현군]] 등과 자주 술을 마시다가 1463년 5월 4일 동생 [[익현군]]이 술병으로 사망하였다. 이때 [[세조(조선)|세조]]는 '이것은 모두 계양군의 허물이다. [[의창군(1428)|의창군]]이 술로써 죽었는데, [[익현군]]도 또한 술로써 죽으니 매우 슬프다.' 하였다. 1464년(세조 10년) 4월부터 병석에 누웠다가 그해 8월 16일에 사망하였다. >'''계양군 이증의 졸기''' >계양군(桂陽君) 이증(李璔)이 졸(卒)하니, >3일 동안 조회와 저자를 정지하고 거애(擧哀)하였다. >임금([[조선 세조|세조]])이 심히 애도하여 육선(肉膳)을 물리쳤다. >(중략) >이증(李璔)의 자(字)는 현지(顯之)이며, [[세종(조선)|세종]](世宗)의 후궁 [[신빈 김씨]](愼嬪 金氏)의 소생이었다. >[[세종(조선)|세종]]이 끔찍이 사랑하였고, >이증(李璔)이 학문을 좋아하여 책을 공부하기에 게을리하지 않았다. >[[세조(조선)|임금]]이 즉위할 때 좌익(佐翼)의 공(功)이 있었고, >[[세조(조선)|임금]]이 중하게 여겨 서무를 출납하도록 하여 은고(恩顧)가 더욱 융숭하였다. >이증(李璔)이 병들자, [[세조(조선)|임금]]이 내의를 보내어 치료하고, 하지 않은 바가 없었으나 >끝내 효험을 볼 수가 없었다. >(중략) >이증(李璔)은 성질이 단아하고, 용의가 아름답고, 담화를 잘하였으며, >사람을 대하거나 물건을 접할 때 겸손 공경하였고, >일찍이 귀(貴)하고 세력 있는 것을 스스로 자랑한 적이 없었다. >이때에 주색으로 인하여 졸하였다. >— 《세조실록》 34권, >세조 10년(1464년 명 천순(天順) 8년) 8월 16일 (정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