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경희궁 (문단 편집) === 대한제국 === [[고종(대한제국)|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당시 황궁이었던 [[덕수궁|경운궁(덕수궁)]] 영역을 북서쪽으로 대대적으로 확장했다. 그에 따라 경운궁과 경희궁 궁역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경희궁은 현재 서울역사박물관과 구세군 회관 아래쪽 신문로까지 포함하고 있었고, 대한제국 시절 경운궁의 부지도 지금보다 북서쪽으로 더 넓었기 때문에 경희궁과 상당히 가까웠다.] 경운궁 확장 공사가 1차로 끝나가던 시점인 1901년(광무 5년)에 덕수궁과 경희궁을 잇는 [[덕수궁 운교|홍교]][* 무지개다리라는 뜻이다. 운교라고도 불렀는데 이 쪽은 구름다리.]라는 다리가 세워졌다. 당시 경희궁 영역에는 전각 5개만 남아 있는 상황이었지만, 홍교로 덕수궁과 연결된 덕분에 대한제국 시기에 경희궁에서 국가행사가 개최되기도 했다. 특히 대부분의 전각이 철거되어 넓은 공터가 있었던 덕분에 관병식장으로도 사용되었으며, 1899년 독일의 [[하인리히 폰 프로이센]] 왕자가 방한했을 당시 이곳에서 관병식과 활쏘기 훈련을 참관하기도 했다. 1904년 [[고종(대한제국)|고종]]이 재위 40주년을 맞이했을 당시에도 이곳에 외국 귀빈들을 초청해 군기분열 행사를 열 계획이었다.[* 그러나 [[콜레라]]의 창궐과 [[러일전쟁]] 발발로 인해 재위 40주년 기념 행사가 완전히 취소되면서 군기분열 행사 역시 계획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그러나 1907년([[융희]] 원년) [[고종(대한제국)|고종]]이 [[헤이그 특사|강제퇴위당하고]] 새로 즉위한 황제 [[순종(대한제국)|순종]]이 [[창덕궁]]으로 이어하면서 덕수궁은 황궁의 지위를 상실했고, 경희궁 사용 빈도 또한 현저히 줄어들다. [[일본 제국|일제]]는 [[신문로]]의 교통 흐름을 막고 있던 [[덕수궁 운교|홍교]]를 1908년(융희 2년)에 철거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서대문 운교.png|width=100%]]}}} || || {{{#gold '''경운궁과 연결했던 운교.[* [[http://m.cha.go.kr/heri/gungDetail/gogungDetail.do?serial_number=129&detail_code=20&gung_number=4&language=&pageNo=&listFlag=list|사진 출처: 문화재청.]]] 돈의문에서 신문로 방향으로 촬영한 사진이다.'''}}}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