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경희궁 (문단 편집) === 경복궁 중건으로 인한 대량 철거 === 그동안 경희궁이 일제에 의해 훼손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1865년(고종 2년) [[경복궁]] 중건을 위한 자재로 사용하기 위해 경희궁 전각의 대부분이 철거되었다.[* 1860년(철종 11년)에 철종이 경희궁에 6개월간 머물렀다는 기록이 경희궁의 마지막 사용 기록인데 적어도 이때까지는 경희궁이 온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원래 경희궁에는 전각 100여 동이 있었지만, 주요 전각 5개를 제외하고 모두 헐려 경복궁의 궐내각사와 나인전 건설 자재로 쓰였다. 최근까지만 해도 일제강점기가 아닌 조선 말기에 경희궁이 대거 훼손되었다는 주장은 믿기 어려운 [[도시전설]]에 가까운 얘기로 치부되었지만, 최근에 이를 뒷받침하는 학술 논문들이 발표되면서 사실로 확정되었다. 그러나 학계를 제외하면 어떠한 대외적인 자료에도 이러한 사실이 언급되고 있지 않아 대다수의 국민들은 아직도 경희궁이 일제에 만행에 의해서 파괴된 것으로 알고 있다. 경복궁 중건 공사에 대한 기록이 담겨 있는 《경복궁영건일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 서궐(경희궁) 내에는 [[경희궁 숭정전|숭정전]], [[경희궁 회상전|회상전]], 정심합(正心閤), 사현합(思賢閤), [[경희궁 흥정당|흥정당(興政堂)]]만 남기고 그 나머지는 모두 헐었다. 목재를 가져오니 다수가 썩었다. 이 가운데 좋은 것을 골라서 (경복궁의) 나인간(內人間)과 각사의 건조에 사용했다. [[한일합방]] 이후 [[일본 제국|일제]] [[경성부]]에서 간행한 '경성부사'에 따르면 1910년 당시 경희궁에 남아 있는 전각이 [[경희궁 숭정전|숭정전]], [[경희궁 회상전|회상전]], [[경희궁 흥정당|흥정당]], [[경희궁 흥화문|흥화문]], [[황학정]] 뿐이라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는 《경복궁영건일기》의 기록과 일치한다. 《경복궁영건일기》의 기록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경복궁 중건이 시작된 직후인 1865년(고종 2년) 4월에서 8월까지 동안 경희궁 훼철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후 철거된 경희궁 부지에 대한 사후 처리에 대한 기록들이 나온다. 1868년(고종 5년) 6월에 [[경복궁]] 중건을 마무리한 후 경희궁, [[용동궁]], [[수진궁]], [[어의궁]] 등 4궁을 비롯한 몇몇 관청의 밭을 개간될 수 있도록 분배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1870년(고종 7년)에 [[호조(조선)|호조]]와 선혜청에서 곡식 보관 창고가 부족하다면 경희궁터에 [[창고]]를 지을 것을 건의했고 2년 뒤 풍년이 들면서 200칸의 창고를 지은 것과 화약 보관 창고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개화기]]에 [[서양인]]들이 남긴 여러 기록들에도 경희궁이 거의 완전히 훼손된 상황이 나타나 있다. 개화기 당시 [[한성부|한성]]에 체류한 것으로 보이는 길모어라는 서양인이 쓴 《서울풍물지》에는 1883년(고종 20년) 경희궁 터에 뽕나무를 심고 양잠소를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고, 콜로네 브라운이 작성한 지도에 경희궁 위치에 '옛 왕궁' 내지는 '뽕나무 궁궐'이란 표기가 있다. 또한 실제로 조선 말의 경희궁 지역 사진을 보면, 건물이 몇 동 안 남아 있고 전각 주변은 허허벌판임을 확인할 수 있다.[* 1900년대 초까지의 사진상으로 보이는 남아있던 전각들을 나열해보자면, 정문인 흥화문과 금천교. 정전인 숭정전. 편전으로 많이 활용된 흥정당. 중궁전(왕비의 침전)으로 사용된 회상전이 전부이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P1060512.jpg|width=100%]]}}} || || {{{#gold '''1901년(광무 5년) 이전에 촬영된 경희궁 숭정전 사진[br](프랑스어 교사인 샤를 알레베크가 제작한 사진 엽서의 사진)[* [[:파일:알레베크 사진엽서 경희궁 숭정전.jpg|사진엽서 전체의 모습은 이 링크로 들어가면 볼 수 있다.]]]'''}}} || 이처럼 경복궁 중건을 위해 경희궁의 대부분이 철거되면서 사실상 궁궐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경희궁 숭정전|숭정전]]을 비롯하여 살아남은 전각 5채는 이후 사신 접대 등 행사 용도로 간간히 사용되었을 뿐이었다. [[경희궁 숭정전|숭정전]]의 경우에는 창살로 장식된 문들을 모두 떼어내 [[수원화성]]의 연무대(동장대)처럼 군사사열이나 행사를 위한 목적으로 개조되기도 했다.이 시기 버려진 경희궁은 [[호랑이]]와 [[표범]]들이 몸을 숨기던 주요 서식지 중 하나였다. [[https://m.dongascience.com/news.php?idx=50592|#]]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