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경태제 (문단 편집) == 기타 == * 명나라 관련 역사를 다룬 책에서 경제(景帝)라고 칭하는 황제가 이 사람이다. [[명나라|명]]·[[청나라|청]] 시대의 관습대로라면 연호를 써서 경태제로 불렸어야 하지 않나 싶지만, 일반적으로 그냥 시호의 약칭인 경제라고 칭했다. 400년 전, 만력제 시절에 편찬된 백과사전 삼재도회에서도 경태제가 아닌 경제라고 칭했다. 억지로라도 이유를 추정을 해보자면 이런 사정 때문일 듯하다. 영종이 복위한 뒤 경태제는 황제였던 게 취소돼서 성여왕으로 강등당했는데, 연호 경태는 취소되지 않았었다.[* 연호를 취소하지 않은 이유를 굳이 추측해보자면, 경태 연호를 취소하고 정통 연호를 되살리는 선택은 경태 연호를 새 연호로 개원하는 선택에 비해 큰 혼란을 일으킬 수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또는 국정의 쇄신을 지향하는 의미에서 과거의 정통 연호가 아닌 새 연호를 도입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여겼을 수도 있다.] 즉 영종 복위 후의 관점대로라면 '경태' 연간은 경태제 주기옥이 재위 상태였던 게 아니고 명목상 영종의 치세였다. 그래서 이 관점대로라면 주기진 = 영종 = 정통제 = 경태제 = 천순제가 되므로[* 주기진을 굳이 경태제라고 부르진 않았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이렇게 된다는 뜻이다.] 감히 주기옥을 경태제라고 부르지 못했을 것이다. 이후 [[성화제]] 때 주기옥이 황제로 복권돼서 시호를 받았지만 그를 경태제라고 부르기를 꺼리는 습관이 남아 그냥 약칭 시호인 경제로 불렸다고 짐작해봄직하다. * [[베이징]]에 있는 [[명 13릉]]에 묻히지 못한 명나라 황제 3명 중 한 명이다. 사망 후 명 13릉에 묻히지 못하고 베이징 서산에 별도로 매장되었던 것.[* 나머지 두 명은 [[홍무제]] 주원장과 [[건문제]] 주윤문. 주원장 시대에는 난징이 수도였기에 남쪽에 무덤을 썼고 주윤문은 자신의 삼촌한테 쫓겨났기에 시신조차 찾질 못했다.] 그의 장례식 역시 황제의 장례식이 아닌 친왕의 장례식이었으며 묘호 역시 주어지지 않았다. 대종이라는 묘호는 남명 정권 때 붙였지만 청나라에서 인정하지 않았고... * 황후는 즉위 전 성왕비였던 왕씨를 즉위 후 황후로 삼았으나, 이후 총애를 잃어 1452년 폐출되었고 황태자로 책봉된 주견제의 생모 귀비 항씨를 새 황후로 삼았다. 항씨는 1456년 사망하여 숙효황후(肅孝皇后)로 추시되었으나 정통제의 복위 후 황후 지위와 시호가 삭탈되었다. 폐황후 왕씨는 성왕비로 강등되어 50년을 더 살다가 1507년 사망하였고, 사후 [[정덕제]]에 의해 황후로 복권되어 정혜경황후(貞惠景皇后)로 추시되었다.[* 이후 남명의 홍광제가 시호를 추가하여 효연숙의정혜안화보천공성경황후(孝淵肅懿貞惠安和輔天恭聖景皇后, 약칭 효연경황후)로 재추시되었다. 후술할 고안공주는 이 왕씨 소생이다.] * 실질적으로 경태제의 외동딸이었던 고안공주는 탈문의 변 이후 공주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군주(郡主)[* [[친왕]]의 딸에게 내리는 칭호이다. 조선에서는 [[세자]]의 적녀에게 내리는 칭호로 사용했다.]로 격하되었으나 황족 지위는 잃지 않았다. 왕헌(王憲)에게 하가하여 슬하에 아들 하나를 두었고 1491년 사망했다. * 생모 오 태후가 조선 출신이라는 설이 있다. 명사 외척전에는 오 태후는 단도현(장쑤 성 전장 시) 오안의 딸이라고 하였다. 그에 반해서 성호 이익의 성호사설에는 오 태후가 1427년에 명나라로 보낸 우군사정 오척의 딸이고, 태후가 조선을 그리워해 자신의 얼굴을 그린 그림을 조선으로 보냈으며, 그 화상이 아직도 남아있다고 썼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