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경양방죽 (문단 편집) === 2차 매립 === [[8.15 광복]] 이후 광주의 인구는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했다.[* 불과 5년 사이 8만([[1944년]])에서 14만([[1949년]]) 가까이 증가하여 남한 5대 도시가 되었다.] 이런 가운데 제대로 된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아 [[1950년대]]에 경양방죽은 늘어난 광주 인구로 인해 오염되어 저수지 기능을 상실했고 수질은 점점 악화되었다. [[1966년]], 광주시는 위와 같은 이유로 남은 경양방죽마저 매립을 결정했다. [[태봉산]]을 헐어 그 토사로 경양방죽을 매립했는데, 여기에는 다른 이유가 숨어있었다. 광주시는 시내의 중심도로인 금남로를 당시로선 파격적인 8차로로 확장하려고 했는데 당시 정부는 ''''광주같은 작은 도시에 왕복 8차로 도로가 가당키나 하나[* 이 때도 광주가 [[전라남도청]]이 소재한 전남의 중심도시이기는 했지만 지금의 광주에 비해서는 인구나 여러 면에서 전국적으로 봤을 때는 그렇게까지 큰 도시는 아니긴 했다.]''''며 예산을 주지 않았다.[* 사실 1968년이면 한국에 왕복 8차선 이상 도로가 정말 드물긴 했다. 기껏해야 [[서울특별시|서울]] [[세종대로|세종로]] 정도였는데 이 도로는 조선 건국 때부터 계획된 도로였다. 비슷한 규모의 도시였던 인천 역시 왕복 6차선 도로가 가장 넓은 도로였다. 1970년대 들어서야 넓은 도로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1968년 자동차 대수는 전국에 약 35,000대였고, 당시 광주 인구는 60만 명 정도였다. 당연히 정부에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돈이 필요해진 광주시는 [[태봉산]]을 헐어 그 토사의 일부를 팔고 경양방죽을 매립해 만든 계림동 신시가지를 분양해 그 돈으로 금남로 확장공사를 했다. [[1968년]]의 일이다. ||<#FFF>[[파일:gybj.jpg]]|| || {{{#07F ■}}}-1930년대 1차 매립, {{{#00F ■}}}-1960년대 2차 매립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