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경양방죽 (문단 편집) === 1차 매립 === > '''"장차 광주가 대도시로 발전할 때를 대비해서 경관이 수려한 풍치지구로 보전되어야 한다."''' >---- > -경양방죽 매립반대투쟁위원회의 매립 반대 이유 중에서. [[1935년]], 당시 [[전라남도지사]]였던 야지마 스기조(矢島杉造)를 중심으로 매립 계획이 세워졌다. '일본건국기념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계림초등학교 뒤에 있던 경호대라는 산을 헐고 그 흙으로 방죽을 메워 일본인들의 택지를 만드는 계획이었다. [[1936년]] 광주부는 공유수면 4만여 평의 매립을 허가한다. 당시 급격히 증가하던 인구를 수용하고, 공유수면매립을 통해 땅을 팔아 재원을 충당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광주부민들은 이에 반대해 저명한 인사였던 최흥종 [[목사]]를 위원장으로 하여 '경양방죽 매립반대투쟁위원회'를 결성했다. [[조선총독부]]에 청원을 하는 등 반대운동을 벌였지만 총독부는 이를 묵살했고 결국 매립이 강행되었다. 다만 여론을 의식했는지 본래의 전면 매립에서 계획이 변경되어 1/3은 호수로 남게 되었다. 매립 이후 1940년부터 2년간 매각이 진행되었고, 1941년에는 매립지에 부영주택을 건설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