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경순왕 (문단 편집) == 기타 == * 조선 왕조 말기에 들어와 후처 [[낙랑공주(고려)|낙랑공주 왕씨]] 소생들인 [[경주 김씨]] 일문들에 의해 세워진 '신라경순왕전비'(新羅敬順王殿碑)에 정비 [[죽방부인]]을 전비(前妃) 박씨로, [[낙랑공주(고려)|낙랑공주]]를 후비(後妃) 왕씨라 기록하고, 공주 왕씨(公主 王氏)는 누락하고 있는데, 사실 [[낙랑공주(고려)|낙랑공주]]는 신라가 멸망한 뒤에 시집왔으니 신라의 왕후는 아니다. 다만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한 이후 그 지위가 '''정승공'''(正丞公) '''낙랑왕'''(樂浪王)이라는 군왕(郡王)급 제후왕의 [[작위]]에 봉작되었기 때문에 [[낙랑공주(고려)|낙랑공주]]는 신라 국왕의 왕후가 아닌 고려의 제후왕인 낙랑군왕의 왕비가 된다. * 한국사 역대 임금 중에서는 조선 후기의 [[영조]]와 더불어 대단히 장수했다. 비록 신라 국왕으로서의 재위기는 8년에 불과하나 고려 제후로서는 42년 동안 봉임되었으며, 고려 제5대 대왕인 [[경종(고려)|경종]]의 치세기간인 978년에 사망해 천수를 모두 누렸다. * 1934년 간행된 《신라삼성연원보》는 그의 첫째 부인으로 송희부인(松稀夫人) 석씨(昔氏)를 등장시켜 슬하에 14남 3녀를 두었다고 하는데, 역사학계와 신라계 김씨들은 위보로 간주하고 있다.[[http://pub.chosun.com/client/news/viw.asp?cate=C03&mcate=M1004&nNewsNumb=20150116540&nidx=16541|출처]] * 먼 옛날 [[진평왕]](제26대)이 [[옥황상제]]에게서 받았다는 [[천사옥대]][* 《[[고려사]]》에서는 '''성제대'''(聖帝帶)라고 썼다.]를 고려에 항복한 직후인 937년에 창고에서 꺼내 태조 왕건에게 바쳤다. 중국의 [[전국옥새]]처럼 신라에서 일종의 천명을 상징하는 물건이란 의미가 있었던 듯 하다. * 의외로 무속에서 '신'으로 모셔지는 왕이다. 그 이유는 그가 [[고려]]의 태조에게 항복한 것이 괜히 저항했다가 백성들에게 [[간디(문명 시리즈)|유혈사태]]가 일어나게 하는 것보다 백성들을 다치지 않게 하려는 자비심에서 우러나왔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까지도 각지에 경순왕을 모시는 사당이 많이 남아 있었으며, 경상도와 충북 일대, 경기도 일부 지역에 경순왕 사당이 많았다고 한다. 지금도 시골을 돌아다니다 보면 경순왕 사당과 이를 모시는 무당들이 가끔 보인다. 무속에서는 《삼국유사》와 마찬가지로 '김부대왕'으로 모시는 경우가 많으며, 그 아들인 [[마의태자]]와 동일시되기도 한다. * [[형산강]]에는 경순왕이 용으로 변신했다는 설화가 전해내려온다. 경주와 포항의 경계 지역에는 형산과 제산이 있는데, 과거에는 그 두 산이 하나로 합쳐져 있었고 남천, 기계천 등에서 나오는 물로 지금의 [[안강읍]] 지역에 큰 호수가 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물난리가 잦아 치수가 어려웠는데, 이를 위해서는 용으로 승천하여 그 산을 갈라야 했다. 그 때문에 왕이 기도를 드려 승천을 했는데, 이 때 용이 되기 위한 조건이 바로 누군가가 승천한 왕을 용으로 불러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때 승천한 왕이 뱀처럼 보여 사람들이 모두 다 큰 뱀이라고 불렀으나, 유금이라는 이름의 어린 아이 한 명만이 뱀이 아니라 용으로 불러주었고, 그제서야 용으로 승천할 수 있었다. 그 덕택에 산이 갈라지고 물이 빠져 나가게 되었으며, 물이 빠져 나간 뒤에 생긴 들판을 그 어린 아이의 이름을 빌어 '유금'이라고 불렀다. 현재 지명으로 [[강동면(경주)|강동면]] 유금리가 존재하는데, 유금이라는 명칭이 여기서 유래되었다. [[파일:W0OIQn1.jpg|width=100%]] * [[어진]]의 [[눈썹]] 모양이 상당히 특이한데, [[당나라]] 시대 귀족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양식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혹은 [[불화]]에 가깝게 여러 차례 이모되면서 불화의 전형적인 표현 양식을 띠었을 수도 있다. * [[어진]]이 남아있지만 경순왕을 상보로 삼은 제서는 경순왕의 외모에 대해 영특한 기상은 하늘을 업신여길 만한 외모였다고 한다.[[https://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1&totalCount=0&prevPage=0&prevLimit=&itemId=sy&types=r&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sy_002r_0010_0190_0060&position=-1|출처]] * 신라의 마지막 국왕이라서 나라가 망한 책임을 물을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신라는 [[견훤]]이 [[경애왕]]을 살해하고 아직 신라에게 충성을 바치던 경남북 일대 호족 세력들을 초토화한 시기에 돌이킬 수 없이 끝장나 있었다. 경북 서북부 일대가 그나마 죽음을 무릅쓰고 끝까지 저항했지만 그 지역 호족들이 '''믿고 바라던 주군은 이미 [[왕건]]이었지 경순왕은 아니었다'''. 따라서 경순왕이 할 수 있는 정치적 선택은 항복을 왕건에게 하느냐 견훤에게 하느냐. 또 언제 항복할 것이냐 뿐이었다. 경순왕은 그 상황에서도 견훤이 왕건을 한참 정신 못 차리게 밀어붙이던 시기에는 최대한 견훤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노력했는데 이는 정말 대단한 판단력과 자제력이 아닐 수 없다. 최대한 상황에 따라 적절히 판단하여 서라벌의 백성과 신료들을 보전한 훌륭한 임금으로서, 평화롭거나 나름 신라가 여력이 있었을 때 즉위했더라면 [[명군]]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고 볼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