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경성고무 (문단 편집) === 쇠퇴 === 한국전쟁 이후 부산지역에는 일본의 영향을 받아 많은 신발공장들이 생겨났고, 일제강점기 이래 전성기를 구가하던 군산 경성고무는 큰 도전에 직면했다. 1964년에 이만수 창업주가 세상을 떠나자 아들 [[이용일]][* [[KBO 리그]]의 역사를 알고 있는 이들에게는 친숙한 이름이다. [[군산상업고등학교 야구부]]가 창단될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해준 전북야구의 대부이며 훗날 [[KBO 리그]]가 창설될 때 산파 역할을 하며 초대 사무총장을 지냈다.]이 가업을 이었다. 1970년대 초반, 경성고무는 고무신 외에도 폴리우레탄과 스폰지를 생산하며 고무신 쪽 경영난을 타개했다. 방한용 의류 안감용으로 인기가 높았는데, 의류업자들이 스폰지를 확보하기 위해 몇 천만 원씩 선불을 주고 공장 인근에서 대기할 정도여서 경영에 큰 도움이 됐다. 당시 대부분의 방한의류에 스폰지가 들어가야 소비자들이 눈길을 주었으니, 의류업자들은 스폰지를 사기 위해 장사진을 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노동집약적인 신발공장이 많아지면서 경쟁이 심화하고, 인건비까지 크게 오르면서 경성고무는 바이어가 원하는 신발가격을 제시하기 힘들어지는 경우가 많아졌다. 1980년대 중반을 넘어서며 한국 신발산업은 급격히 퇴조했다. 민주화 운동, 노동운동이 거세게 일면서 신발공장 근로자들의 임금 인상 압력이 커졌고, 비싸진 임금 부담을 견디지 못한 부산지역 유수의 신발공장들이 문을 닫거나, 중국·베트남 등 인건비가 싼 지역으로 대거 빠져나갔다. 또한 1972년 부터 큰 화재가 3차례에 걸쳐 잇달아 일어난데다 수출부진으로 계속 적자에 시달려오다 1979년 선경그룹과 합자 경영에 들어가면서 이용일 사장은 경영일선에서 물러나기 시작했고, 1983년에는 선경에 완전 매각했다. 선경은 경성고무를 인수한 후 신발수출업으로 업종을 변경시켰고, 1988년 군산공장을 분리 후 (주)선화로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011600099207006&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88-01-16&officeId=00009&pageNo=7&printNo=6729&publishType=00020|출범시켰고,]] 1990년에 전주공장을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0090100329213003&editNo=3&printCount=1&publishDate=1990-09-01&officeId=00032&pageNo=13&printNo=13827&publishType=00020|노조에 넘겨]] (주)원양으로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1050800099218010&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91-05-08&officeId=00009&pageNo=18&printNo=7792&publishType=00020|출범시켰다.]] 결국 본사는 운수업 등지로 전환한 채 그룹 내에서 애물단지로 전락해 1998년부터 SK창고에 [[http://m.hankookilbo.com/news/read/199808050025795445|합병되어]] 65년만에 소멸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