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경성고무 (문단 편집) === 중흥기 === 그 당시 군산에는 고베에서 온 사업가가 세운 고무신공장이 있었는데, 이 공장이 매물로 시장에 나온 것이다. 이만수 사장은 일본인 사장이 공장을 내놓자 이를 놓치지 않고 인수, 1932년 11월13일 경성고무공업사를 설립했다. 이 당시 군산의 공업은 일제 독점자본으로 발전했고, 대부분의 공장이 일본인 소유였다. 1932년 이만수 사장이 설립한 경성고무공업사는 한국인 기업가에 의해 설립된 유일한 중소기업이었다. 군산시 장재동에 자리잡은 경성고무공업사는 당시 임직원이 100여명이었다. 서울 이북지방에서는 삼천리표 고무신이 인기였지만, 서울 이남지역의 고무신은 경성고무의 '만월표'가 최고 인기 제품이었다. 이 때 주 생산품은 '깜둥이 신발'로 알려진 검정 고무신이었다. 검정 고무신은 주로 짚새기를 신고 다니던 일반 한국 서민들에게 대단한 제품이었고, 그 인기는 시들 줄 몰랐다. 경성고무는 점차 기술 수준을 높여 제품을 다양화 해 나갔는데, 나중에는 표백기술을 적용해 흰고무신을 생산했고, 검정 운동화에 이어 하얀 운동화도 생산했다. 경성고무공업사는 해방 직전까지 이 4가지 제품을 생산, 전국에 공급했다. 1일 생산량은 일제강점기 당시 500족 정도에 불과했지만, 해방 후 60년대 들어서는 3만족에 달했다. 시대가 변하면서 소비자들의 요구에 부응, 하늘색 등 색고무신을 출시했고, 꽃무늬 고무신과 농구화, 포화 실내화, 슬리퍼 등 다양한 제품들을 생산하며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고무신 공장은 초창기는 물론 지금까지도 제작 공정 특성상 노동집약적이다. 실제로 전성기 때 하루 3만 족 이상을 생산한 경성고무의 경우 직원이 무려 3000명에 달했다. 이 가운데 2500여명이 여성이었다. 고무판을 생산하는 롤러부를 비롯해 남자들이 근무하는 부서는 주야간으로 계속 일해야 밀려드는 일감을 댈 수 있었다. 그러나 여성 근로자들은 낮에만 근무했다. 운동화를 만들면서부터는 경성고무공업사 공장 한켠에 방직공장도 뒀다. 실을 사다가 방직공장에서 운동화용 천(캔버스)를 직접 만들었고, 여성 근로자들이 재봉틀 등을 이용해 운동화 어퍼(Upper)를 제작했다. 또 롤러 등 고무신 생산라인의 기계가 고장날 경우 공장내 기술자들이 필요 부품을 제작하는 등 직접 수리에 나섰기 때문에 공장 내에 철공소도 운영했다. 즉, 고무신공장 내에 방직공장, 미싱부, 철공소까지 둔 셈이다. 게다가 신발 크기와 모양이 각양각색이기 때문에 금형(Mold)도 수십종류에 달했다. 금형은 신발공장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 중 하나이기 때문에 디자인 전문가를 두고 금형을 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