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경부고속선 (문단 편집) === 기본 계획 및 변경 === 당초 구상은 1970년대부터 꾸준히 나오고 있었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73042800099208001|「"黒字실어나르는 鐵馬"經営合理化의化身…鐵道廳의 오늘」]], 매일경제, 1973-04-28] 이후 1976년 8월 경부터 [[한국개발연구원]]에서 연구에 들어가, 다음해 타당성 조사를 하게 된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77030800209201012|「朴大統領에 計劃을報告 京釜「新幹線電鐵」建設검토」]], 경향신문, 1977-03-08] 당시부터 [[호남고속선]]은 물론이고 심지어 광주~부산을 잇는 [[경전선|경전]]고속선도 구상 중에 있었던 모양이며, 경전고속선은 2020년 기준으로 경전선 개량 및 직선화를 통한 준고속철도 운행으로 예정되어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제4공화국|제4공화국]]이 79년 [[10.26 사건]]으로 인해 사실상 파행으로 치달으면서 계획이 통째로 묻힌다. [[대한민국 제5공화국|제5공화국]]의 출범 이후, 1980년대 중반까지 계속 잊혀 있다가 1980년대 말 다시 떠오르기 시작했다. [[1989년]] [[인천국제공항|수도권 신공항]]과 함께 2대 국책 사업으로 선정되었다. 원래는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공약한 대로 노태우 대통령 임기 중인 [[1992년]]에 착공하여 총 사업비 5조 8천 400여억 원을 투입해 [[1998년]]말에 완공하려는 계획이었으나, 이듬해인 1993년 사업비가 2배가량인 10조 7천 400억 원으로 불어나고 개통 시기도 2001년으로 늦춰졌다. 그 이후에도 [[1997년 외환 위기]] 등과 겹쳐 계획이 여러 차례 바뀌고 미뤄진 끝에 당초 예정시기보다 17년 늦은 2015년 8월이 되어서야 서울 도심구간을 제외한 전 구간이 개통되었다. 이때 국내 기술로는 고속철도 차량과 시스템을 개발하기에 부족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철도 선진국의 고속철도 기술을 도입해 국산화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국제 입찰을 벌이고 이에 [[독일]]의 [[인터시티익스프레스|ICE]], [[프랑스]] [[TGV]], [[일본]] [[신칸센]]이 각각 컨소시엄을 구성해 입찰하여 경쟁했다. 그러나 세 컨소시엄 모두 당초 기술 이전에 부정적이었기 때문에 협상은 난항을 겪었으며, 이에 따라 차량도 선정되지 못한 채 [[1992년]] 천안(현재의 [[천안아산역]])과 대전을 잇는 시험선 구간을 1997년말 완공을 목표로 착공했다. 협상을 거듭하면서 기술이전 부분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진전이 생겼으며, 이 과정에서 고속철도 기술 이전에 가장 부정적이었던 [[신칸센]] 컨소시엄이 1993년 6월에 탈락했고[*a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3061500329101001|「高速철도 佛·獨압축」]], 경향신문, 1993-06-15] [[1993년]] 8월 [[지멘스]]사의 [[인터시티익스프레스|ICE]]와 치열한 경쟁을 벌인 끝에 프랑스 [[알스톰]]사의 [[TGV]]가 최종 선정되었다. 공사 시작 1년도 되지 않아 전국적인 지가 상승과 예산 조달 문제로 건설교통부는 1993년 6월 서울, 대전, 동대구역의 지하역 계획을 전부 취소하였고, 서울~수색, 서울~안양 구간의 지하 건설 계획을 지상화로 변경, 대신에 경기도 안양시 석수동 소재에 새로운 고속철도 역을 신설하는 계획으로 변경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광명역]]이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3061500209101003|「安養에도 시발驛」]], 동아일보, 1993-06-15] 같은 날 나온 한겨레와 경향신문도 [[석수역]]에 남서울역을 짓는다는 계획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3061500289114001|「고속철도 차량 프랑스-독일 압축」]], 한겨레, 1993-06-15][*a] 이후 1994년 1월 감사에서 이 문제를 놓고 1조 4300억 원이 절감되는 것이 맞지만, 경부고속철도 2단계 개통까지 고려하면 실질적으로는 사업비가 6000억 원만 절감되는데, 늘어나는 운행시각은 15분 30초가 될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4012200289103005|「고속철도 건설사업과 감사원의'권고'」]], 한겨레, 1994-01-22] 당시에는 서울 도심구간 개통을 2009년으로 잡고 있었다. 이 논란을 겪은 뒤인 1995년 4월 25일 대전, 대구 도심구간의 지하화 계획이 원복되었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5042600289109007|「고속철도 대전·대구 지하건설 공식 확정」]], 한겨레, 1995-04-26] 그러나 갈수록 경부고속철도 사업비의 급증과 철도교량 및 터널 안전성 시비로 공사기간은 엿가락처럼 늘어났다. 1995년 이후 터진 가장 큰 안전성 시비 중 하나인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에 있는 상리터널 구간이다. 이 구간에 [[1991년]]에 폐광된 납과 아연, 중정석을 채굴하던 삼보광산의 갱도가 거미줄처럼 있다는 것이 발견되었는데, 이 때문에 붕괴위험이 있음에도 계속해서 굴착을 강행했다는 것이 드러났다. 공사중단 시점인 1996년 하반기 기준으로 상리터널 전체 2,260m 중 298m를 굴착한 상태였다.[*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1996/11/13/1996111370266.html|「[상리터널 답사] 건교위 의원들 `폐광구간'에 경악」]], 조선일보, 1996-11-13] 또한 이 문제뿐만 아니라 침출수에 의한 환경오염 문제도 제기되었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5091900329101002|「고속철 수도권구간 폐광空洞 10여개 안전무시 굴착 강행」]], 경향신문, 1995-09-19] [[1997년]] 3월 원래 선로에서 동쪽으로 최대 500m 정도 이동해서 터널을 뚫는 것으로 계획을 최종변경했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7031800329121007|「경부고속철 상리터널 변경노선 확정」]], 경향신문, 1997-03-18] 상리터널 근처 구간이 약간 곡선을 그리고 있는 이유이며, 현재도 대부분의 KTX 열차는 이 구간에서 시속 250~270km 정도로 서행한다. 교량 상판 설계 결함 문제도 제기된 적도 있었는데, 이는 1997년 2월까지 교량상판을 표준설계도로 재설계하기로 했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6112700099101007|「고속鐵 교량상판 全구간 재설계」]], 매일경제, 1996-11-27] 1997년 12월에는 천안~대전 시험선 구간에 있는 시목1교와 노장교가 안정성을 이유로 철거되기도 하였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8012400289103005|「경부고속철 교량 2개 철거」]], 한겨레, 1998-01-24] 위와 같은 공사의 난항으로 [[1996년]]에는 대구~부산 구간은 기존 경부선을 전철화해 [[2002년]] 서울~부산 전 구간을 정상운행한다는 목표로 계획이 변경됐다. 이외에 경주 근처 노선 변경 등 여러 사건이 터지면서 사업비는 계속 불어나다가 결국 외환위기로 사업이 일시 중지되었다. 이 와중에 방치되어 있는 고속철 전선을 잘라다 녹여서 구리로 팔아먹은 일당이 검거되는 등의 사건도 발생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