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경부고속도로 (문단 편집) === 고속도로 건설 배경 === [[일제강점기]] 이후 1960년대 중반까지 대한민국 교통 인프라는 철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1950년대 중반 도로기술 공무원들이 미국의 도로 및 도로 공사를 연수 시찰하면서 미국의 고속도로를 처음 접한 바 있으나, 당시 자동차는 부유층들이나 가질 수 있던 비싼 사치품이었던 데다가, 천문학적인 예산 소요 등으로 고속도로 건설은 꿈도 꾸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한편 1950년대 후반부터 국토종합개발계획의 필요성이 정부 내에서 논의되기 시작하여, 1960년에 이르러 국토건설본부가 설립되고 1961년 국토개발문제를 우선적 과제로 삼기 시작했다.[* [[http://theme.archives.go.kr/next/gyeongbu/makePlan01.do|#]]] 이에 국토계획기본구상(1963년 7월), 국토건설종합계획법(1963년 10월 14일) 등을 통해 국토종합개발을 위한 제도적 기틀을 마련하는 한편 국토개발사업을 계속 이어나갔다. 그러나 1960년대 초반까지 정부는 향후 수십년간 한국에 고속도로 따위는 필요없다는 한미합동조사위원회 등 국내외 전문가들의 용역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고속도로 건설을 완전히 배제하고 있었다. 1960년대초부터 시행된 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은 물론 2차 경제개발계획에서도 철도 예산이 도로 예산의 3.5배로 책정[* 경향신문 1966년 6월 10일 2면 중앙]되는 등 그때까지 과거 일본처럼 철도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1960년대 들어 한국에서도 자동차 보급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게 되었다. 교통수단으로서 자동차 성능 향상과 보급이 눈부시게 이루어지던 당시 사회 전반에서 자동차 도로 확충에 대한 요구가 나오게 된다. 60년 중반 도로의 향후 수요 증가량, 도로가 여객, 물류 두 부분에서 철도를 압도한다는 전망들이 속출했고 도로교통망 확충에 대한 요구도 높아졌다. (경향신문 1966년 6월 20일) 1960년대 후반부터 정부도 전향적으로 이러한 요구와 전망을 수용했다. 한편 주원 전 건설부 장관 등의 증언에 따르면 따르면 [[박정희]] 대통령은 집권 초부터 이미 고속도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1964년 12월 박정희 대통령이 차관 도입을 요청하기 위해 9박 10일 일정으로 서독을 방문했을 때 서독 정부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서독 전국 각지의 산업시설을 시찰시켜줬는데, 이때 [[아우토반]]을 여러 번 왕복하게 된 박정희 대통령은 고속도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아우토반에서 잠시 차를 세우도록 하여 노면과 분리구조물 등의 재질을 직접 확인해보기도 했고, 서독 측 관계자에게 아우토반 건설 비용 등을 물어보고 수첩에 적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수첩에 서울에서 시작해 전국 주요도시를 잇는 노선을 쭉쭉 그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귀국한 후 1965년부터 정부에서 비공개로 고속도로 건설계획안에 대한 내부검토가 시작되었다. 박정희 전기를 작성한 마이클 키온에 따르면, 박정희 대통령이 고속도로에 관한 모든 자료들을 찾아 놓으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선진국, 심지어 소련 등 공산주의 국가의 고속도로 관련 정보도 있으면 가리지 말고 전부 구해다 놓으라 지시했다. 이후 박정희 대통령 본인도 그 자료들을 매우 자세히 읽었다고 하며, 이를 바탕으로 고속도로 기본설계나 공사비를 산출해 보았다고 한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blog.joins.com/map.jpg|width=100%]]}}}|| ||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직접 스케치한 경부고속도로의 구상도 || 그리고 약 2년간의 연구 후 1967년 대통령선거에 재선 출마한 박정희 대통령이 고속도로 건설을 선거공약으로 내세우면서 국민들에게도 정부의 고속도로 건설 계획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67년 5월 재선에 당선되자 고속도로 건설은 공식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했다. 1967년 국토계획기본구상이 수정ㆍ보완되어 대국토건설계획서(안)이 나왔고, 경인 6차선 도로([[경인고속도로]]) 계획 등이 최초로 정부 문서에 명문화되기 시작했다. 이후 1967년 12월 15일에 '국가기간 고속도로 건설 계획 조사단'을 발족시켜서 건설을 체계적으로 준비했다. 그러나 당시 [[국제부흥개발은행]] 총재 유진 블랙은 개도국이 고속도로를 건설하는데 돈을 쓸 필요는 없다는 이유로 건설 차관 발급을 거부하면서 재원조달에 난관을 맞게 되었다. 결국 [[차관]]을 확보하지 못한 정부가 건설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선택한 고육지책이 1968년 2월 29일 통과시킨 휘발유세 인상안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