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경대승 (문단 편집) === 기해정변과 집권 === 1179년 9월에 30여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궐에 난입,[* 견룡군(왕의 친위대) 소속으로 궁에 있던 [[허승(고려)|허승]], 김광립이 궐에서 내응하였다.] 당시 실권자이던 [[정중부]], [[정균]], [[송유인]], 송군수, 이경백, 문공려 등을 살해한 후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의 나이 겨우 26세 때였다. 이후 그의 족형인 장군 손석의 부추김으로 자신의 경쟁자가 될만한 인물들인 오광척, 김광영, 송득수, 기세정, 지유 석화, 습련 등을 붙잡아 처형시켰다.(30명이라는 소부대 특공으로 정권을 잡은 사례가 남은 탓에, 이후 고려에서는 온갖 군소세력들이 항복하는 대신 발악을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당시 임금인 [[명종(고려)|명종]]을 비롯한 문신들은 폭정을 일삼던 정중부와 그 일당을 척살한 경대승에게 축하연을 열었는데 경대승은 모든 문신들이 모여있는 자리에서 >"선왕을 죽인 자가 버젓이 살아있는데 그대들은 술잔만 기울이고 있는 것인가!" 라고 대놓고 일갈하였다. 이에 선왕 [[의종(고려)|의종]]을 죽인 [[이의민]]이 경계해서 병사를 두어 경비할 정도로 당시 겨우 26세의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정 대신과 장수들이 벌벌 떨었다고 하니 확실히 풍모는 대단했던 듯 하다. 이후 쫄아버린 이의민은 경대승을 피해 지방으로 도망가 숨어 살다가 그의 사후에야 명종의 부름으로 다시 관직에 들게 된다. 한편 일각에서는 이 일 때문에 경대승이 명종의 신뢰를 얻지 못한게 아니냐는 시각도 제기하는데 사실 선왕 의종은 정당하게 계승한 왕위를 무신정변으로 빼앗긴 것이고, 명종은 그러한 정변 세력에게 옹립되었기에 [[정통성]]이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 명종이 비록 [[인종(고려)|인종]]의 아들이긴 했지만 태자로서 계승한 왕위와 무력으로 신하들이 옹립한 왕위에서 명분이 어느 쪽이 밀릴지는 자명한 것. 그러한 상황에서 권력을 장악한 경대승이 의종에 대해 '선왕'이라는 말을 언급하며 이의민의 숙청을 외친 건, 현재의 임금인 명종의 약한 정통성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드라마 <[[무인시대]]>에서는 이 설을 적극적으로 채택했다.] 1180년 12월에 자신과 함께 공을 세운 [[허승(고려)|허승]], 김광립 등이 교만을 부리며 은밀히 불량배들을 양성하고 방약무인한 행동을 보이자 그들을 죽였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자신을 위협할만한 경쟁자를 미리 죽인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선왕을 시해한 자라 일침을 놓았던 이의민 역시 [[끔살]]하려 했으나 이의민의 동지이자 경대승의 친우였던 [[두경승]]의 밀고로 이의민은 부리나케 튄다. 허승, 김광립 등을 죽이자 경대승은 군대의 호위를 강화하고 왕에게 이 사실을 알렸으며 재상 이하가 그의 집으로 찾아가 축하하니 스스로 안심하고 군대의 호위를 그만두었다고 한다. 이후 그는 한 국가의 권력을 장악한 최고 실세임에도 불구하고, 평생 조정에 출사하지 않았으며 집권 이후 [[군부]]도 사직하여 집에서 소소하게 생활하였다. 그러나 국가에 큰 일이 있을 때는 대궐로 나가 왕에게 의견을 밝혔는데 그 때마다 명종은 그의 의견에 무조건 따랐다고 전한다. 경대승은 정권을 장악하는 동안 문신 우대 정책을 펼쳐 많은 문인이 과거에 응시하고 합격했지만 그렇다고 무신 세력을 대놓고 탄압하지도 않았다. 사실 이 때쯤이면 이미 [[문벌귀족]]들과 고위 무신들 간의 혼인 동맹이 맺어지고 있는 때였다. 특히나 정중부는 문벌귀족들의 말살을 원하지 않았던 인물로 자기가 권력을 잡기 위해서 문벌귀족들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생각해 마구 날뛰는 [[이의방]]과 [[이고]]를 제지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정중부 정권에서도 문신들이 무신들보다 더 많은 숫자를 자랑했고, 당연히 더 많은 관직들을 지니고 있었다. 당장 정중부부터가 조정 영수가 되는 방식으로 결탁한 문벌귀족들과 함께 전횡을 일삼았다. 이는 훗날 최충헌이 비슷하게 보여준다. 즉, '''문벌귀족들부터가 이미 저 당시에는 정중부와 함께 전횡을 일삼은 동지들이었고''', 무신들과도 혼인동맹으로 연결된 상태였다. 당장 정균은 본처를 버리고 상서 김이영의 딸과 결혼하기까지 하는 등 정중부부터가 문신과 사돈관계를 맺은 상태였다. 심지어 무신들의 기관인 중방이 막강한 권력을 지니게 됨에 따라 '''문신들이 무관직을 겸하며 중방 회의에 참석할 정도였다.'''[* 즉 문신들은 정중부 정권에서 이미 상당히 세를 회복하며 무관들 사이에 섞여 다시 이전의 횡포를 부려나가고 있었다. 경대승이 무신정변을 부정하며, 문신 우대를 하려고 한들 이미 무신들과 결탁하여 깊이 엮인 문신들 입장에선 불필요한 분쟁거리였을 것이다.] 허나 거사 과정에서 정적들이 많아지고[* 애초에 경대승 세력은 집권 이전까지는 나이로 보나 뭐로 보나 기존 권력층들과 접점이 있는 세력이라고 보기는 어려웠고, 정중부 일파를 제거하고 권력을 차지한 것 역시 세력 싸움에서 이겼다기보다는 기습에 가까운 뒤통수치기로 이뤄낸 결과였다. 덕분에 결과적으로 경대승은 권력을 차지하고서도 하급 관리들의 인식과 무관하게 무신 권력 집단이었던 중방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으르렁댔기 때문에 운신의 폭 역시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이의민을 죽이지 못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으며, 문관들이나 명종 역시 의종의 정통성을 강조하는 경대승을 싫어했다.] 독살 위협 등에 시달려서인지 의심이 많아져 문객들을 보내어 [[유언비어]]를 탐문하고 뭔가 낌새가 보이면 즉시 관계자를 잡아 가두고 국문하는 등 여러 번의 큰 옥사를 만들어 가혹한 형벌을 적용하였다. 1181년 3월에는 전(前) 대정 한신충, 채인정, 박돈순 등이 군사를 일으킬 것을 모의하자 영사동정 대공기의 밀고를 듣고 왕에게 고하여 체포했다. 이후 석화, 별장 박화, 주부 이돈실 등도 사건에 관계가 있는 것을 알고 한신충, 채인정, 박돈순, 이돈실 등은 귀양보내고, 석화는 남해 현령, 박화는 하산도 구당사로 좌천시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