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경기도청 (문단 편집) === 수원 이전 === [youtube(mjEgKRizRXI)] 식민강점이 끝난 이후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 역시 일제강점기의 경기도청사를 그대로 사용했다. 그러나 [[6.25 전쟁]]이 터지면서 도청은 수원으로 임시 이전했고, 그 사이 서울이 황폐화되어 도청 건물이 반쯤 무너지기도 했다. 1953년 휴전 뒤 복귀하긴 했으나, 엉뚱하게도 서울은 경기도가 아닌데 도청이 외로이 시내 한복판에 있어 문제가 되었다. 이미 1946년 서울이 경기도에서 분리된 이래 도청 복원 논의가 이미 진행되어 1953년 4월 15일 인천에서 먼저 '경기도청 유치위원회'가 발족되자 1주일 뒤 수원에서도 '경기도청 수원 존치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존치란 표현을 쓰는 이유는, 조선시대에 수원에 경기도 [[감영]]이 있었고 6.25전쟁 당시에도 임시도청이 설치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1962년에 수원의 지역 유지 김구배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게 도청을 수원으로 이전하자는 건의서를 제출하였는데, 1963년에 [[박창원]] 경기도지사는 청사를 시흥군 안양읍에 이전하자고 보고했다. 그러나 [[이병희(1926)|이병희]][* 훗날 무임소장관을 역임했고, 수원시 최다선 의원을 기록했다.] 수원유치위원장이 도의 발전과 미래를 생각하며 삭발까지 감행해 박정희 의장에게 찾아가 무릎을 꿇고 도청 이전을 관철토록 했고, 그 결과 1963년 법률 제1538호에 따라 수원으로 신청사 부지가 결정되어 이듬해부터 공사에 들어가 1967년부터 완공 후 서울 시대를 마감했다. 반면 구 서울 도청사는 1967년 이후 [[행정안전부|내무부]]의 [[대한민국 경찰청|치안국]]이 청사로 쓰며 오랫동안 치안본부 청사로 쓰였으나, 1986년에 치안본부가 서대문 신청사로 이전하면서 [[서울특별시청]]의 경찰국이 별관으로 쓰다가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9101000209214003&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9-10-10&officeId=00020&pageNo=14&printNo=20930&publishType=00020#|건물의 노후화와 기존 [[정부서울청사]] 주차장 협소]]를 이유로 1990년 4월에 철거되었다.[* 1989년부터 계속 보존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고 한다. 후에 의정부터 발굴작업 때 본관기초부와 별관기초부가 발굴된다.] 당시 경기도청을 경기도 제1의 도시인 [[인천광역시|인천]]이 아니라 수원으로 옮긴데다 도청 출장소(현 경기도청 북부청사)마저 인천이 아닌 [[의정부시|의정부]]에 설치했기 때문에, 인천시에서는 도청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이 생겼다. 더구나 인천에서 수원에 있는 도청을 왕래하려면 서울을 경유하거나 시간이 많이 걸리는 [[수인선(협궤)|수인선 협궤열차]]를 이용해야 해서 매우 불편했고, [[수인로]] 개통은 도청 이전 10년 후(1977년)의 일이었다. 이는 [[인천광역시|인천]]이 [[직할시]]로 승격한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인천시 당국에서는 직할시 승격을 '독립'이라고 칭할 정도로, 수원을 중심으로 한 경기도정과의 앙금이 남아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